▶ 내년 10월 제1회 환태평양 응급의학학회 여는
스토니브룩 뉴욕주립대 이종서 교수는 요즘도 대학생 시절보다 더 열심히 공부한다.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서이다. 응급의학 전문의로서 환자의 생명을 살리고 가르치고 연구하는 일을 좋아하고 일 속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는 그의 적극적 삶 이야기를 들어본다.
▲감동의 순간, 정해진 전공
7,000명 규모의 ‘미국응급의학학회’(AAEM)의 12명 이사 중 유일한 한인이사로 활약하는 이종서(42)씨, 퀸즈 지역 의료봉사로 한인들에게도 낯익은 그가 내년 10월 큰일을 저지른다.한국응급의학학회(KSEM)와 공동으로 ‘제1회 환태평양 응급의학학회’(Pan-Pacific Emergency Medicine Congress 2012)를 개최하는 것이다. 미국과 일본, 싱가폴 등 30개국에서 온 2,000여명 응급의들이 참여하는 행사를 서울 코엑스에서 10월23일~26일까지 4일간 연다.
“세계적인 응급의학의 석학들을 한국에 초청하여 최신 응급의학 정보를 교류한다”고 가슴 설레며 말하는 이종서씨는 이에 만반의 준비를 착착 진행 중이다.
코리안 아메리칸으로서의 정체성을 겪으며 치열하게 살아온 그는 이규완, 이부섭씨의 1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초등학교 6학년인 79년 미국 LA로 이민 왔다.
“수학은 쉬웠으나 영어를 한마디도 못해 ESL 반에서 영어를 배워야 했다. 힘들게 공부하다보니 나중에는 길이 보였다. 대학교수이던 아버지는 LA로 이민 와서 꽃가게를 운영 했다. 고등학교와 대학시절 방과 후나 방학이면 집안일을 도왔다.”특히 밸런타인 데이에 히스패닉 딜리버리 맨이 모자라면 손님이 주문한 꽃을 들고 여자한테 전해주었다.“공부하느라고 바빠서 대학시절에도 여자친구를 사귀지 못했는데 다른 사람 대신 사랑의 고백을 하러 간 셈이다”고 호탕하게 웃는 이종서씨.
그는 UCLA 대학에서 생화학을 전공하며 공부가 너무 힘들어 ‘어떻게 살아야 할 까’ 고민이 컸지만 열심히 노력, 시카고 의대에 좋은 성적으로 입학했다.
“1990년경 대학생 때 UCLA 응급실에 자원봉사를 나갔는데 한 중국인 의사가 심폐소생술로 막 죽어가는 환자를 살려내고는 놀라서 바라보고 있는 내게 윙크를 한 뒤 사라졌다. 너무 멋져 보였다, 나도 저렇게 사람의 생명을 살리고 싶다 하는 감동의 순간 내 전공은 전해졌다. ”시카고 의대를 졸업한 후 매사 적극적인 그의 성격은 다시 발휘된다.
“NYU 응급의학과 레지던트를 뽑는데 800명 중 13명을 선정했다. 12명은 이미 뉴욕의 대학이나 병원에서 실습을 해서 학교 측에서 잘 아는 학생이었고 나에 대한 정보는 학교측이 전혀 몰랐다. 매일 담당과장에게 전화해서 꼭 가고 싶다며 나를 알린 결과 NYU 레지던트가 되었고 5년간 많이 배울 수 있었다”
1996년 뉴욕 NYU로 오면서 시작된 뉴욕생활은 이제 16년이 되었다. 2000년부터는 플러싱 병원 부과장으로 있으면서 수많은 한인노인들의 메디케이드 문제, 한인사회 봉사활동을 했고 미주한인의사협회(KAMA) 의학잡지 편집위원장을 4년간 지내기도 했다.
2005년 스토니브룩 대학이 그에게 손을 내밀었고 이후 그는 스토니브룩 의대 교수이자 응급의학 전문의로 일하게 되었다.
▲생명 셋을 살리다
스토니브룩 병원 응급실에는 일주일에 3일간 하루 세 교대로 나눠 근무하는데 교수 10명이 환자 300여명을 나눠 본다. 오전에 일하는 날은 오후 4시에 일이 끝나지만 이종서씨는 여세를 몰아 계속 책을 보고 공부를 한다.
그는 이제 ‘치명적인 상태의 환자가 응급실에 오면 저 환자 5분후에 죽겠다 판단하면 5분후에 죽는다.’고 할 정도로 응급의학 전문의로 ‘도사’가 되었다.
“환자 상태를 보고 몇 단계인지 재빨리 판단하여 응급처지 해야 한다. 생명과 직결되는 가장 최전선에 서있다 보니 늘 새롭다.”강의, 수술뿐 아니라 부지런히 논문도 쓴다. 복통을 비롯 맹장염에 대한 80여편 이상의 논문을
썼고 모두 SCI(Science Citation Index)저널에 등록되었다. 특히 맹장염을 진단하는데 아직까지는 CT가 정확하지만 원자력 사용을 줄이기 위해 복통 관련 연구를 많이 하고 있는 중이다.
미응급의학협회 회원으로 일찌감치 한국과 대만에 강연을 다니던 중 하와이에서 열린 ‘미국과 일본 외상학회’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그때 ‘언젠가 나도 세계적인 응급의학학회를 15년 안에 열겠다’는 꿈을 지니게 되었고 이번에 그 꿈을 이뤄 내년 10월에 대회를 개최하게 된 것이다.“궁금한 게 있으면 못 참는다. 다양한 케이스 연구가 너무 재미있고 내 일에 대한 자부심과
행복감을 동시에 느낀다”는 이종서 교수, 그는 이미 눈앞에서 죽어가는 환자 3명을 살려냈다.
1993년 시카고의대 3학년때, 17명의 총상환자가 한꺼번에 몰리자 의사는 물론 레지던트도 응급처치를 했다. 그는 얼굴에 총을 맞고 턱이 내려와 피가 줄줄 흐르는 흑인여자를 응급처리 후 살려냈다.두 번째는 대한항공을 타고 한국 가던 중 천식환자 응급사태가 발생하자 기내방송이 의사를 찾았고 그는 앨러지 주사와 알약으로 목숨을 구했다. 세 번째는 한인 대형마켓에서 심장마비가
온 젊은 남자로 심폐소생술로 살려냈다.
이 모든 것은 그가 한국말을 잊어버리지 않은 영향이 크다. 중학교 시절 아버지가 매일 한국어로 일기장을 쓰라고 한 덕분이다. 누나 둘도 모두 공부를 잘해 회계사, 내과의사가 되었고 여동생도 AIG 보험 중견사원으로 일하고 있다. 한국에서 편히 살 수도 있는데 자식 교육을 위해 미국에 이민 온 부모가 밤낮으로 꽃집에서 막일 하며 열심히 사는 모습이 롤 모델이 되었기 때문이다.
▲먼저 다가가 친구 만들기
그는 기꺼이 한인사회 1.5세와 2세의 롤 모델이 되고자 한다.
“한인10대들이 주체성에 눈뜨면서 외로움을 많이 느끼고 탈선의 기회도 생긴다. 혼자만 겪는 일이 아니다. 외로움을 피하려고 술이나 마약에 손대면 한 학기는 고사하고 인생 자체를 망치게 된다. 두려움을 없애고 리더십을 키워야 한다.”
원래 이종서씨는 수줍은 성격이었다. “대학에 가서 서바이벌 하려고 적극적으로 성격을 변화시켰다. 도전의식이 필요하다.”는 그는 스스로 다가가 친구하자고 할 것을 권한다.“의과대학에 가니 자신감이 생겨 적극적으로 스터디그룹도 만들었다. 그때부터 한국을 오가기 시작했다. 서울대, 연대, 아주대 등 대학과 병원의 배우고 싶은 과에 내가 먼저 전화했다. 나 이런 사람인데 그곳에서 연구하고 싶다면 대부분 수락 했고 2~3개월 나가서 수련을 했고 인맥을 쌓았다”는 그는 “결혼을 시켜줬으니 한국응급학회 발전에 기여해야죠”하고 유머스럽게 말한다.
한국응급학회 회장인 가톨릭 대학 교수가 중매를 선 아내 박지현씨는 터프스 치대를 나와 현재 미국 병원에서 풀타임 치과의로 근무 중이다. 둘 사이에 1남 1녀를 두었다.그가 가장 강조하는 것은 의사로서의 마음가짐과 태도이다.
“의사가 바쁘다고 해서 차갑고 냉정하게 대하면 환자가 어려워한다. 노인분을 보면 눈을 보면서 손을 잡아주고 못 일어나는 분은 고개 숙여 귀에 대고 말하거나 청진기를 직접 귀에 대어주며 아버지처럼 대해야 한다.”
이종서 스토니브룩 뉴욕주립대 응급의학 전문의, 그는 실력 있는 의사 이전에 따스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 먼저 될 것을 강조하는데 그래야 환자가 마음의 문을 열기 때문이란다. <민병임 논설위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