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무대에서 조명을 받으며 춤사위를 이어 온 지도 어느덧 반세기에 달하고 있다. 화려한 미디어 아트와 전자 사운드를 앞세운 퓨전 공연이 관객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는 시대이지만, 필자는 끝내 검무의 날 선 기세와 승무의 잔잔한 호흡을 놓지 않았다.
낯선 땅에서 전통을 지킨다는 일은 외롭고 더딘 길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고립이 오히려 필자 춤사위에 불순물을 들이지 않는 방파제가 되어 주었다. 타국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있었기에, 유행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원형의 장단과 선(線) 을 온전히 붙들 수 있었다.
그렇다고 현실의 무게가 가벼운 것은 아니다. 전통을 고집하는 동료 단체들은 요즘도 객석을 채우는 일에 진땀을 흘린다.
‘공연은 관객과 함께 완성된다’는 말이 무색할 만큼, 무대 아래 빈 좌석의 어둠은 예술가의 자존심을 송두리째 흔든다. 박수 소리에 앞서 생활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젊은 무용수들에게 “열정만으로 버텨 보라”는 주문은 지나치게 가혹한 짐이 되고 만다. 필자 또한 교육과 강연, 한인 사회 후원 덕분에 생계를 이어 왔기에, 다음 세대에게 완고함만을 미덕으로 강요할 자격이 없다.
그래서 요즘 필자는 ‘변화’를 다시 들여다본다. 뿌리는 깊이 내리되, 가지와 잎은 시대의 바람을 받아 흔들려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한다. 북 장단을 전자음으로 재해석하더라도, 기본 호흡과 선이 흐트러지지 않는다면 충분히 새로운 이야기가 될 수 있다. 교육 과정에 무대 기술과 영상미학을 함께 가르치고, 젊은 안무가에게 전통 장단을 자유롭게 변주할 기회를 열어 주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게라도 관객이 찾아와 후배들이 전업 예술인으로 살아갈 토대를 마련할 수 있다면, 변화는 전통을 배반하는 길이 아니라 다음 세대로 건너가는 튼튼한 다리가 될 것이다.
물론 전통 예술의 지속 가능성은 개인의 노력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한인 사회와 한국 정부, 그리고 지역 예술 재단이 전통무용의 가치와 경제적 생태계를 함께 살필 때 비로소 결실을 맺을 수 있다. 춤사위마다 새겨진 역사와 정신성은 한민족의 문화 DNA이자, 미국 다문화 사회에 기여할 귀중한 자산이다. 관객 한 사람 한 사람의 발걸음, 후원 한 줄기, 무대 한 칸의 기회가 모여야만 전통의 불씨가 꺼지지 않는다.
필자는 우리의 세대가 맡은 몫으로, 끝까지 원형의 춤사위를 지켜 낼 것이다. 동시에 제 빈자리를 채울 다음 사람에게는 전통을 품은 ‘새로운 언어’를 허락하려 한다. 뿌리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더 넓은 하늘로 가지를 뻗어 나가는 일?그것이야말로 전통과 미래를 함께 살리는 가장 현실적이고도 희망적인 길이라고 믿는다. 언젠가 관객으로 가득 찬 극장에서 후배들의 춤사위에 조용히 박수를 보내는 날을 기다리며, 오늘도 필자는 낯선 땅의 무대 한 켠에서 북의 울림을 단단히 붙들고 있다.
그래서 이번 광복 80주년 기념 무용극 *‘광희’*에서는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하지 않기로 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라는 전통 민요를 무대의 정서적 축으로 삼고, ‘사의 찬미’의 노래에 맞추어 빛을 활용한 젊은 제자들의 퓨전 무용을 적극 도입했다. 또 극중 특정 장면에서는 1920년대 유행했던 찰스턴 춤의 요소를 삽입하여 시대성과 상징성을 함께 담아보려 했다. 이러한 변화를 기꺼이 받아들이면서도 진정한 전통의 정신을 잊지 않고 이어주는 것, 그것이야말로 선배 세대가 해야 할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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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화 김응화 무용연구소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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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내것을 지키고 노력하고 가꾸는건 나를 우리모두를 내 자존심을 지키는 본받을만한 훌륭한 일 아자 아자 화이 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