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6월 3일 서울은 거리로 뛰쳐나온 대학생들로 넘쳐났다. 김종필 공화당 의장이 한일 국교 정상화 회담을 위해 일본으로 출국하자 서울대, 연대, 고대 등 1만2천여 학생들이 중앙청으로 몰려들어 이를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기 때문이다. 박정희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들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1965년 6월 22일 3억 달러의 무상 자금을 받는 대가로 국교 정상화에 합의했다.한일 관계는 그후 30여년이 지난 1998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며 다시 획기적인 전환점을 맞게 된다. 그동안 일제 잔재 청산 및 왜색 문화 배격을 위해 금지됐던 일본의 대중 문화를 단계적으로 개방하기로 한 것이다. 그 때도 일본 저질 문화 유입으로 한국 고유 문화가 훼손되고 국민 정서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반대 여론이 높았으나 이제는 우리 사회도 이를 수용할 정도로 성숙했고 그렇게 하는 것이 국제화 시대에 걸맞는 자세라는 이유로 이를 단행했다.그 후 3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 당초 우려와는 달리
지인이 운영하는 LA 다운타운 패션 디스트릭트 모자 도소매 매장의 유리창이 깨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건은 국토안보부(DHS) 소속 연방이민세관단속국(ICE) 요원들이 장갑차까지 동원해 한인 운영 의류 업체 ‘앰비언스’를 급습한 다음날인 7일, 트럼프 행정부의 이민정책에 반발한 시위대가 거리로 쏟아져 나왔을 때 발생했다. 이 사장님는 크게 당황했다. 매장의 가장 큰 유리가 총알인지 돌멩이인지 알 수 없는 물체에 맞아 산산조각이 났고, 시위대는 점점 난폭해지고 있었다. 유리 수리업체에 연락해도 출장 서비스가 불가능하다는 답변뿐이었다. 결국 근처 홈디포에서 나무판자를 사서 뚫린 구멍을 대충 막고 가게 문을 닫았다. 그렇게 진땀을 빼고 나서야 겨우 다운타운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했다.그 업소 유리가 박살 난 지 이틀 뒤인 월요일, 한인 의류도매 업체들이 모여 있는 흔히 ‘자바’라 불리는 곳으로 현장 취재를 나갔다. 이동하며 대략 어떤 상황일지 예상은 했지만, 실제 눈앞에 펼쳐진 모습은
“누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를 잘 잡는 게 좋은 고양이다.”1962년 7월 중국공산주의청년단 3차 7중대회의 연단에 오른 덩샤오핑 당시 중앙서기처 총서기 겸 국무원 부총리는 도탄에 빠진 중국의 농촌 경제를 살릴 방안을 거론하며 이같이 설파했다. 당시 마오쩌둥 주석의 비판을 받으며 그대로 묻혀버린 이 주장이 빛을 본 것은 십수 년 뒤의 일이다. 마오의 사후 중국의 권력을 쥔 덩샤오핑은 1979년 1월 누런 고양이를 흰 고양이로 바뀌 ‘흑묘백묘론’을 다시 꺼냈다. 공산주의든 자본주의든 인민들을 잘살게 만들면 된다는 실용주의에 기반한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이 세계 최대 빈곤국이던 중국을 세계 2위 경제 대국으로 성장시켰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올 1월 23일, 조기 대선을 기다리던 이재명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흑묘백묘론을 소환해 실용주의를 선언한 지 약 5개월이 지났다. 이재명 대통령은 당시 유력 대선 후보로서 “검든 희든 쥐만 잘 잡으면 좋은 고양이 아니겠냐”며 “현실적
녹음이 짙어가는 6월이다. 이맘때가 되면 잊히지 않는 일이 있다. 올해로 6.25 75주년을 맞는다. 필자는 2년 전에 한국전쟁 기념관에서 열린 6.25 73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했다. 주일 예배 끝나고 늦게 도착해서인지 행사가 마무리되고 있었다. 그곳에서 예상하지 못한 풍경을 마주했다. 행사 프로그램 표지는 무명 병사의 철모 사진이었다. 표지 위에 “You are not forgotten.”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 짧은 문장이 필자의 마음과 시선을 압도했다. 사진 속 철모는 군데군데 찢어지고 퇴색되어 그날의 참혹했던 상황을 말해주었다.행사장 한쪽에 전시된 흑백사진들은 그날의 생생한 모습과 전쟁의 상흔을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다른 한쪽에는 6.25를 기념하는 학생들의 사생대회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전쟁을 겪지 않은 어린 학생들이 조국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은 용사들에 대해 어떤 마음으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을까. 작품들을 보며 그 날을 상상해 보았다.참전용사들은 누군가의 소
루이 다게르가 1839년 공식 발명한 이래 사진은 세상 모든 것을 담는 도구가 됐다. 총알이 날아가는 찰나같이 사람 눈으로 포착할 수 없는 순간까지 사진에 담을 수 있게 되면서, 사진은 단순한 기록 수단을 넘어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 자체를 바꿔놨다. ‘보여지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라 믿는 ‘시각중심주의(Visualism)’의 확산이 대표적이다. 동시에 이미지의 편집·연출 등으로 진실과 허구의 경계는 허물어졌다.■ 무엇을 찍고, 보여주는지가 권력이 되는 시대가 열리자 권력자는 사진을 이용했다. 나치 독일 요제프 괴벨스가 대표적이다. 시민들도 사진기를 들고 절대 권력에 맞섰다. 20세기 최고 저널리스트 로버트 카파는 스페인 내전과 제2차 세계대전 등 전장을 누비며 찍은 사진으로 전쟁의 실상을 알렸다. 루이스 하인은 미국 전역을 돌며 아동 노동의 실태를 기록해 산업혁명의 그늘을 폭로했고, 도로이사 랭은 세계대공항 시기 이주민과 빈곤층 삶을 사진에 담는 것으로 구조적 문제를 고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