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배제한 북-미 직접대화" 촉구
박정희 전대통령 ‘핵미사일 개발 프로젝트’ 취임하자마자 중단압력
워싱턴 포스트 기고문 통해 한미 공동대응 공개비난
클린턴 강경 대북정책 훼방 놓는 등 사사건건 돌출행동
박정희 대통령이 핵무기 개발을 시도한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으나 당시 그의 구체적인 계획이었던 ‘작계 890’에 대해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1978년 6월 작성, 최근 비밀 해제시킨 문서에서 존재 자체가 확인된 ‘작계 890’은 박정희 대통령 정권 시절 한국정부가 자주국방 노력의 일환으로 핵무기 개발과 중거리 미사일 개발 등 비밀리에 추진했던 여러 프로그램들을 하나로 엮어 북한 전역을 사정거리에 둔 중거리 핵미사일 개발을 목표로 한 종합 프로젝트였다.
CIA 보고서는 “(한국) 국방부 반독립 부속인 ‘국방과학연구소’(ADD)에서 1972년 말부터 물리학자 한명이 폭발 기술자의 지원을 받으며 핵무기 설계 연구를 시작했다”며 “핵무기 프로그램은 1974년과 1975년에 크게 확장, 본격 구체화돼 ‘890’으로 명명된 프로젝트가 핵과 화학 탄두 연구를 미사일 설계 노력과 결합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보고서는 이어 프로젝트 ‘890’의 감독권은 ‘국방과학연구소’ 부소장에게 주어졌고, “그 아래 단계는 제각기 별도의 예산과 연구 스케줄 및 연구 기간이 주어진 3개 실무 팀(핵, 화학, 미사일) 부서들이 엄격히 분리된 상태로 관리됐다”고 밝혀 실무자들마저 그 존재조차 모르는 극비로 추진됐음을 강조했다.
보고서는 박 대통령이 ‘작계 890’을 추진하게 된 동기를 ▲ 한국 전쟁이후 서울을 향한 평양의 감퇴되지 않는 적대 행위 및 대폭 강화된 북한의 공격 능력과 ▲미국의 대한국 안보 공약 의지에 대한 불신과 특히 핵무기로 한국을 보호할 워싱턴의 의지력에 대한 한국의 의혹이 커짐에 따라 자체적 핵무기 개발을 추진하게 됐고 ▲미국의 핵무기를 대신하기 위한 한국의 대북 억제력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이 애당초 미사일 탑재 핵탄두에 초점을 두고 계획, 추진 됐기 때
문으로 분석하고 있다.보고서는 그러나 박 대통령의 이 같은 노력은 인도가 1974년 5월 핵실험을 실시함에 따라 곧바로 가해진 미국의 압력으로 인해 시작부터 어려움을 겪었고 경제지원과 한미관계를 볼모로 한 미국의 강력한 외교압력으로 인해 1996년 12월 결국 전격 중단된 것으로 밝히고 있다.
‘작계 890’ 중단은 조지아주 땅콩농장 경영자 출신 민주당 후보 지미 카터가 당시 현직 대통령 제랄드 포드 후보를 대선에서 누르고 제39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지 불과 한달만이었다.아니나 다를까 이듬해 1월 백악관 주인이 된 카터 대통령은 곧바로 ‘주한미군 철군’ 추진과 역시 비밀 해제된 CIA 문서에서 뒤늦게 밝혀진 사실이지만 취임직후 한반도에 배치돼 있던 ‘핵무기 철수’까지 검토해 애당초 박 대통령이 ‘작계 890’을 추진하게끔 한 우려가 크게 빗나가지 않았음이 확인됐다. 물론 카터 대통령의 ‘주한미군 철군’과 ‘핵무기 철수’는 당시 한국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행될 경우 박 대통령이 ‘작계 890’을 즉시 재가동 할 것이라는 분석을 비롯해 한반도
및 지역안보 등 여러 이슈들이 고려돼 이뤄지지 않았지만 추진 과정에서 한국 정부와 한국인들에게 ‘만일 북한이 공격해 올 경우 과연 미국이 얼마만큼 적극적으로 한국 방어에 나설까’라는 의혹과 불안을 증폭시킨 것은 물론, 한미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는 결과를 낳았다.이렇게 맺어졌다가 마무리된 카터와 한국과의 ‘인연’은 김영삼 대통령 집권 당시인 1994년 6월 다시 한번 엮어진다.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이 북한과의 핵 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북한에 대한 경제제재와 군사적 압박을 가하고 있던 1차 북한 핵 위기 때이다. 이 역시 뒤늦게 드러난 사실이지만 당시 클린턴 대통령은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을 거부하는 위기를 맞자 “심지어 전쟁을 감수하고서라도(even at the risk of war) 북한 핵무기 개발을 막기로 결심”한 상황이었다. 클린턴 행정부는 이스라엘이 1981년 이라크의 ‘오시라크’ 핵 시설을 공습, 파괴해 핵 개발을 좌절시킨 모델을 따 미국이 영변 핵 시설을 정밀 타격해 파괴할 의도를 갖고 있었으며 실제로 그에 대비해 한국내 미국 민간인 소개 작전과 주한미군 1만명 추가 투입 등 계획을 다듬고 있었다. 그러한 배경에서 북한의 초청을 받은 카터 전 대통령은 방북해 김일성 주석을 만난 뒤 동행한
CNN 방송에 나와 북한이 핵 프로그램을 동결시키기로 했으며 경수로 공급을 약속하면 영구적인 동결도 가능하다고 발표했다.
비록 전직 대통령이기는 하나 민간인 자격으로 방북한 카터가 백악관은 물론 한국과의 사전 조율도 없이 미국과 한국의 대북 정책 유화 노선을 국제사회에 기정사실화 해 버린 것이다.당시 클린턴 대통령은 방북 결과를 백악관이 마련한 기존 대북 정책을 충분히 검토 할 기회도 주지 않고 언론 발표를 통해 뒤집어 놓은 카터 전 대통령의 ‘돌출행동’에 크게 분노했으나 국제사회에서 입지가 좁혀진 상태에서 북한과 직접 대화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카터 전 대통령의 당시 방북은 비록 전쟁도 불사하겠다던 클린턴 대통령의 대북 계획을 되돌려
놓기는 했으나 1994년 10월 북미 제네바 합의를 시작으로 북핵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북한과의 줄다리기 협상이 오늘까지도 계속되는 결과도 함께 낳았다.
그런 카터 전 대통령이 이번에 또 다시 한국과의 인연을 꾀하고 있다. 그는 지난 달 24일 워싱턴 포스트에 기고한 글에서 “북한의 최근 우라늄 농축을 위한 원심분리기 공개와 이번 연평도 포격은 자신의 장래를 결정하게 될 향후 협상에서 응분의 대접을 받아야 하겠다는 점을 전세계에 주지시키기 위해 계획된 것”이라고 분석한 뒤 “궁극적으로, 미국에게 남은 선택은 정교한 외교력을 발휘하는 것과 파국적 대결을 피하는 것 두가지 가운데 하나”라며 북미 직접 대화를 촉구했다.
그는 “미국과 남한의 친밀한 외교적 군사적 유대는 우리로 하여금 남한의 정책에 순응하도록 만들고 있다”며 “북한은 미국과의 직접회담을 고집하고 있다. 평양의 지도자들은 한국의 군대가 워싱턴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고 보고 한국은 1953년 정전협정의 당사자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클린턴 행정부 이래 미국은 6자회담을 통해 협상해 오면서 한국을 배제하게 될 실질적인 양자협의를 대체로 기피했다”고 주장해 현재 북핵 문제에 호흡을 맞춰 공동 대응하고 있는 이명박·오바마 대통령의 한미 대북정책을 공개적으로 비난했다.그는 또 “북한은 과거 미국과의 직접대화에서 자신의 핵 프로그램을 끝내고, 모든 핵 프로그램에 대한 IAEA의 사찰을 수용하며, 1953년 정전협정을 항구적인 평화협정을 대체하는 협정을 마무리할 준비가 돼 있다는 일관된 메시지를 보내왔다. 우리는 이러한 제의에 응답하는 문제를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한 뒤 “그렇지 않으면 북한은 자신이 가장 두려워한다는 미국 지원하의 군사공격과 체제변화 노력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어떠한 행동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고 경고까지 했다.
그러나 카터 대통령의 기고문 내용은 그가 대통령 취임 직후 ‘주한미군 철군’과 ‘핵무기 철수’를 추진한 것과 1994년 6월 방북, 김일성 주석과 일방적인 합의를 이룬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을 배제한 미국에게 한반도 미래의 결정권이 있다는 ‘전제’(premise)에 그 결함이 있다.북한의 연평도 포격은 미군이 아닌 국군 2명과 민간인 2명의 목숨을 앗아갔으며 이전 천안함 격침도 한국 해군 46명을 전사케 했다.북한은 6.25 전쟁 이후 1968년 1월21일 청와대 기습 사건을 시작으로 국립묘지 현충문 폭파 미수(1970년 6월22일), 육영수 여사가 피살된 광복절 대통령 저격 사건(1974년 8월15일), 아웅산 국립묘지 테러(1983년 10월9일) 등 최소한 4차례에 걸쳐 한국 대통령 암살을 기도했고 대성호 납북(1965년 5월), 대한항공 YS-11 항공기납치(1969년 12월), 백건우·윤정희 부부 납치 미수(1977년 7월), 서해 고교생 납치사건(1977년 8월∼78년 8월), 신상옥·최은희 부부 납치(1978년 1월), 노르웨이에서 고상문씨 납북(1978년 4월), 동진호 납북(1987년 1월), KAL 858기 폭탄 테러(1987년 11월), 러시아 블로디보스톡에서 외교관 최덕근 살해(1996년 10월), 이한명 피살(1997년 2월), 금강산 관광객 박왕자씨 피살(2008년 7월) 등 끊임없이 민간인 대 테러 행위를 저질렀으며 무장 간첩선, 잠수정, 공비 침투와 2 차례의 연평해전, 대청해전 등 수 많은 대남 군사 도발을 일으켰다.
카터 전 대통령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또 이미 실패가 명백히 드러난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대북 ‘햇볕정책’ 고수로 한때 껄끄러웠던 한미 관계가 이명박·오마바 대통령 정부 들어 최상 관계로 발전한 현재 미국이 한국을 재처 놓고 북한과 직접 대화를 할 것을 촉구하는 것 자체가 미국에 대한 한국인들의 시각은 물론 한반도 지역 안보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지 충분히 고려했는지 의혹이 제기된다.더 나가서 기고문은 만일 박 대통령이 계획대로 ‘작계 890’을 완성했더라면, 또 클린턴 전 대통령이 1994년 6월 군사력을 동원한 대북 강경 노선을 바꾸지 않았더라면, 즉 한국과 카터와의 인연이 아예 없었더라면 이번 연평도 폭격과 그로 인해 극에 달한 한반도 안보 긴장은 물론 과연 북한이라는 나라가 오늘 존재하고 있을까도 한번 생각해 보는 계기를 제공한다.
<신용일 기획취재 전문기자> yishin@koreatimes.com
1994년 6월 개인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이 선상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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