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대선 후보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이 23일 인디애나폴리스 집회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하와이에서 노환으로 위중한 외할머니를 방문하기 위해 23일과 24일 일정을 대부분 취소한 오바마는 25일부터 다시 본격적인 유세에 돌입한다.
공화당 대선 후보 존 매케인 상원의원이 23일 플로리다 사라소타에서 열린 집회에서 지지자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매케인은 캠페인 버스를 타고 플로리다를 유세 중이다.
양 후보 성장배경 및 이슈별 정책
미국 사상 첫 흑백대결의 역사적인 대통령 선거가 이제 일주일 남짓 다가왔다. 경제 위기와 2개의 전쟁, 계속되는 테러 위협과 이념적으로 분열된 민심을 배경으로 갈림길에 놓인 미국은 과연 어느 길을 선택할 것인가? 젊은 패기와 희망의 메시지를 주는 오바마는 다문화적 경험과 배경이 인종과 계층, 성별을 가리지 않고 전 계층에서 폭넓은 지지를 얻을 수 있는 바탕이 되고 있다. 한편 긴 의정 경험을 통해 독립심과 초당적 협력을 입증한 공화당의 존 매케인 상원의원은 애국심과 리더십을 내세워 워싱턴을 개혁할 ‘준비된 대통령’으로 지지를 얻고 있다. 오바마 의원이 문화의 충돌로 불리는 세계의 문제를 통합의 가치로 새롭게 풀어낼 수 있는 21세기의 새로운 지도자라면 공화당의 존 매케인은 과거 미국을 강대국으로 만든 전통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의 선택을 한 주 앞두고 양 후보의 성장과 배경, 각 이슈별 정책을 정리했다. <우정아 기자>
■ 버락 오바마
다문화적 배경 전 계층서 지지
인종 넘어 첫 흑인대통령 도전
소수계로는 최초로 민주당 대선 후보로 지명된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47·일리노이)은 1961년 8월4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하와이 대학으로 유학온 케냐 출신 흑인 아버지 버락 오바마와 캔자스 출신 백인 어머니 스탠리 앤 더햄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린시절
아랍어로 ‘축복받은’이란 의미를 지닌 버락이라는 이름이 주어졌지만 어린 시절이 결코 순탄치 않았다. 아버지는 결혼 2년만에 하버드 대학으로 공부를 하러 떠나면서 아들 곁을 떠나 두 살 때 결국 이혼했다. 어머니가 인도네시아 출신의 롤로 소에토로와 재혼하면서 인도네시아에서 4년을 보낸 뒤 호놀룰루로 돌아와 외조부모 밑에서 유명 사립학교인 푸나호우 스쿨를 다녔다. 그는 청소년시절에 인종문제로 정체성 갈등을 심하게 겪었고 마약까지 시도해봤다. 그러나 그런 내적 갈등과 방황은 대통령 후보 자리에까지 오게 만든 담금질이었다. 기독교도 신자지만 이슬람교가 지배적인 종교인 인도네시아에서 유년기를, 그리고 다양한 문화 섞인 하와이에서 청소년기를 보내면서 관용과 화합의 정신을 배웠다.
▲대학시절
오바마는 LA에 있는 옥시덴틀 대학에 진학하면서 배리라는 이름 대신 버락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남아프리카 인종차별정책를 규탄하는 집회에 참가하면서 처음으로 정치활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컬럼비아 대학으로 편입, 정치학을 전공했다. 오바마는 시카고 저소득층을 돕는 운동에 투신, 연봉 1만2,000달러에 사회봉사활동을 했고 후에 파문을 일으킨 제레미아 라이트 목사와의 인연도 여기서 시작됐다. 그 후 하버드 법대 대학원에 진학했고 법대 학회지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하버드 로 리뷰’의 흑인 최초 편집장이 됐다. 법대시절 시카고 법률회사에서 연수를 하면서 미셸(44)과 결혼했다.
▲정치활동
오바마는 하버드 법대를 졸업한 후 시카고로 돌아와 인권변호사로 활동했고 1996년 일리노이 주 상원의원에 당선되면서 정치에 본격적인 발을 디디게 됐다. 2004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기조연설을 통해 전국적인 지명도를 얻으며 한순간에 미국의 정치 중심무대로 뛰어 올랐다. 그해 11월 흑인으로는 미국 세 번째 연방 상원의원이 됐고 현재 유일한 흑인 상원의원이다. 오바마는 2007년 2월10일 일리노이 스프링필드에서 “우리 세대가 이제 시대적 소명에 답할 때”라면서 대권도전의 출사표를 던졌다.
■ 존 매케인
해군가문 출신 베트남전 포로
오랜 정치활동 초당적 협력 입증
▲베트남 영웅
존 시드니 매케인 3세는 1936년 8월29일 파나마 운하 통치구역(PCZ)에서 해군 가문에 태어났다. 부친과 조부가 미국 유일의 부자 4성 제독으로 매케인도 1954년 해군 사관학교로 진학, 1958년에 졸업해 해군 조종사가 됐다. 그는 베트남전에서 1967년 10월26일 출격했다가 미사일에 격추돼 북베트남 포로로 잡혔다. 아버지가 미 태평양 지구 사령부의 총사령관으로서 베트남전 수행 책임자로 임명된 후 북베트남은 귀환을 허용했으나 매케인은 먼저 포로가 된 병사가 귀환해야 한다며 이를 거부했다. 매케인은 고문을 당했고 자신이 범죄자라는 거짓 ‘자백’을 서명할 수 밖에 없었다. 매케인은 포로 경험이 건방졌던 자신에게 겸손을 가르쳤다고 말했다.
▲신디 헨슬리
매케인은 1973년 베트남에서 돌아왔으나 부인 캐롤과 사이가 멀어졌다. 1979년 4월 하와이에서 신디 루 헨슬리를 처음 만난 매케인은 곧 그녀와 사귀기 시작했다. 당시 42세였던 매케인은 캐롤과 별거하고 있었다고 회고록에서 주장했으나 이혼신청서에 따르면, 매케인은 1980년 1월까지 캐롤과 같이 살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매케인은 회고록에서 파경 책임이 전적으로 자기에게 있다고 인정했다. 1980년 신디와 결혼하고 애리조나에 정착한 매케인은 1982년 연방하원의원으로 당선됐는데 장인의 도움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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