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를 좋아한다. 내 마음에 몰입할 수 있어서다. 깊은 데서 울리는 어떤 떨림, 뭉클함을 느끼는 순간의 소리를 낚아챌 수 있기 때문이다. 팬데믹 기간에는 평소보다 많이 걸었다. 5마일만 걸어야지, 나갔다가 테메스칼리지 트레일(Temescal Ridge Trail) 허브정션(Hub Junction)까지 왕복 10마일 넘게 다녀오기 일쑤였다. 물병 하나 없이 정오의 뙤약볕 속을 헤집고 다녔다. 올해 초 산불 이후로는 트레일을 막아 놓아서 깊이 들어가지 못한다. 태평양이 초승달만큼 보이는 언덕배기 벤치에서 땀을 닦고 잡념을 버리던 기억이 새롭다.
기억이 천 갈래 만 갈래 묻어나는 멀홀랜드 산길을 따라 걷다 보면 두 개의 벤치를 만난다.
첫 번째 만나는 나무 벤치는 전혀 장식 없는 민낯이다. 등받이엔 ‘이곳에 오는 모든 이들을 위하여’라는 글귀가 음각되어 있다. 누군가를 기린다는 내용은 없다. 그곳을 지날 때마다 벤치는 바빠 보인다. 그늘 한 칸 없어서 수분 없는 피부처럼 낡아가고 있는데, 누군가는 다녀갔다는 증거를 삐뚤빼뚤 새겨 놓아 마음이 편치 않다. 그래도 반려견과 쉬고 있는 혼자 혹은 몇몇이 끊이지 않는 걸 보면 그것이 벤치엔 기쁨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인간적인 벤치라니, 내 맘대로 위로하며 지나쳐 간다.
차량 통제 구역 안으로 진입해서 고즈넉한 곳에 이르면 왼편으로 언덕에 벤치가 있다. 줄기가 여러 갈래로 뻗은 아름드리 느릅나무 그늘 안에 자리를 잡았다. 금속과 목재로 제작된 벤치는 나무줄기에 등을 대고 사람 사는 동네를 바라보며 놓여 있다. 벤치 등받이엔 ‘Ravil Isyanov, September 29, 2021’ 글씨가 새겨진 동판이 부착되어 있다. 그는 어쩌다가 팬데믹 기간에 생을 마감했을까, 안타까워한 기억이 있다. 그 당시 병상에 계시던 한국의 아버지 생각이 겹쳤기 때문이리라. 지날 때 또는 앉을 때마다 애도하게 된다. 생면부지의 그를, 나의 아버지를.
며칠 전 느릅나무 아래 벤치의 사연을 손톱만큼이라도 아는 사람을 산길에서 만났다. 전날 못 찍은 거미집 사진을 찍고 있을 때였다. 어스름 아침 시간, 물방울 다이아몬드가 빼곡히 수놓아진 너울 같은 거미집을 요리조리 찍어대고 있는데, 등 뒤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뭘 그렇게 찍고 있나요? 고개를 돌려 보니, 은발의 통통한 여인이 다가와 있었다. 말없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니 그녀가 깔깔 웃는다. 나 같은 사람이 또 있었네. 그러더니 그녀가 찍은 사진들을 보여 주었다. 사진 속에서 까마귀들은 뽀뽀를 하거나 새끼 입에 먹이를 넣어주려는 찰나였다. 훔치고 싶을 만큼 흥미롭고 생동감 넘치는 사진들에 탄성이 절로 터졌다.
우리는 조금 더 걸었다. 느릅나무 벤치에 다다랐을 때, 그녀가 말했다. 벤치를 갖다 둔 사람은 고인의 친구라며, 이 자리에서 만난 적이 있다고 했다. 단지 그 말뿐이었는데 가슴이 뭉클하니 벤치가 더 다정하게 느껴졌다. 벤치를 만들어 가져다 둔 고인의 친구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런 친구를 둔 Isyanov 씨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걷다 보면 어느 날 아침 우연처럼 또 만나리라 작별의 인사를 나누고 그녀와 나는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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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영라 수필가 미주문협 부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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