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오늘 한국전 61주년
▶ 미군으로 참전했던 이재원씨의 회고
“다시는 한국 땅에, 세계 어느 곳에서도 전쟁이 일어나선 안 됩니다” 올해 87세의 한인 참전용사가 힘주어 말하는 이 한 마디는 나직하면서도 날카로웠다. 한민족 역사상 최대 비극인 6.25 한국전쟁 당시 미군 소속으로 전장에 나갔던 한인 노인의 기억에는 당시의 참상이 61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기 때문이었다.
24일 한국전쟁 발발 61주년을 맞아 국제문화연합회(회장 이메리)가 마련한 참전용사 초청행사에 참석한 이재원(87·사진) 할아버지는 당시의 참화를 회상하며 머리를 흔들었다.
“사범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했어. 당시 영어, 노어, 일본어로 된 책을 읽어야 해서 영어도 좀 한 거야. 그 때문에 한국전쟁 휴전까지 8년을 미군으로 복무한 거야…”
1945년 8월15일 해방 당시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재학생이던 이재원 할아버지는 말 그대로 해방 역사를 다룬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 주인공인 장하림과 같은 삶을 살아야 했다.
“1945년 10월 미 군정에서 통역관으로 일을 시작했지. 내가 맡은 일은 남한정부 구성에 앞서 대민 여론조사를 담당하는 거였어. 대통령 여론조사와 남한 지역 공출 시스템 정상화, 적산가옥 처리도 담당했어. 그러다 전쟁이 터져서 3년 동안 첩보요원으로 참전했지”
미 군정 통역관으로 일한 이재원 할아버지의 소속은 미국 5연대 전투단(5th Regimental Combat Team)이었다. 그에겐 미군 정보요원이란 특성상 계급이 부여되지 않았다. 하지만 첩보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통역’을 담당해 위관급 장교들과 격의 없이 활동했다고 했다.
미군 5연대 전투단은 해방 후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해 주둔한 부대다. 한국전쟁이 반발하자 가장 먼저 부대 증원이 이뤄져 1950년 7월31일 부산 상륙작전에 나섰다.
이재원 할아버지는 전쟁 당시 참상을 생생히 기억했다. “워낙 급하게 전투에 파견돼 미군도 준비가 제대로 안 됐다”고 증언하는 이 할아버지는 “마산 진동리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는 정말 많이들 죽었다”고 말했다. 땡볕이 내리쬐는 한여름에 총상을 입은 전우와 죽은 자의 모습은 61년이 지난 지금도 그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다.
“까마귀가 시체 눈을 파먹는 거야. 전사자가 하도 많으니까 시체 치울 엄두가 안 난 거지. 총상 입은 친구는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전쟁 경험으로 깨달은 게 있다면 다시는 한국 땅에, 세계 어느 곳에서도 전쟁이 일어나선 안 된다는 바람이야.”
조국에서 겪은 전쟁 참상의 충격이 컸던 이재원 할아버지는 휴전과 동시에 미국 이민 길에 올랐다. 이후 알루미늄 창틀과 현관 제작업체를 운영하며 경제적 성공도 거뒀다. 지금은 코로나시에서 남은 여생을 보내는 중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61년이 지난 지금, 이재원 할아버지는 “끝나지 않은 전쟁”이라며 안타까움과 씁쓸함을 내비쳤다.
<김형재 기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