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다닐 때 미술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어렸을 때 화상을 입어서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지셨고 불같이 급한 성격을 갖고 계셨기에 학생들에게 무서운 선생님으로 통했습니다. 외모와 성품이 특별하신 선생님이셨지만 실력만큼은 대단하셨습니다. 시골 중학교였고 당시에는 인터넷 같은 대중매체가 발달하지 않아서 확인할 수 없었지만 국전에서 입상하신 분이라는 소문도 학교에 돌았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선생님의 전공이 동양화였던 것 같습니다. 미술시간마다 창호지와 벼루와 묵을 갖고 오라고 하셔서 난초와 같은 수묵화를 그리게 하셨습니다. 그림에는 얼이 담겨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시지만 까까머리 중학생들이 그 깊은 뜻을 알 리가 없었습니다. 그저 무서운 선생님께 야단맞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그리는 흉내를 내고, 그 와중에도 틈만 나면 얼굴에 먹물을 묻히고 키득키득거리면서 장난을 치곤 했습니다. 그래도 선생님께서는 늘 진지하게 수업을 진행하셨습니다.
그때 배운 것 가운데 잊혀지지 않는 것은 “그림은 여백의 미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저는 미술에 문외한이지만 “여백의 미”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성격도 괴팍하시고 한번 화를 내시면 호랑이처럼 무서우셨던 미술선생님이 생각납니다.
여백의 미는 동양 미술의 진수랍니다. 화판을 가득 채우는 것보다 여백을 남겨두고 그곳에서 예술의 진수를 느끼는 것이 중요하답니다. 여백의 미를 느끼기 위해서는 상상력과 감성이 발달해야 하고 마음에 여유가 있어야 한답니다. 여백의 미는 논리와 실적을 따지는 서양의 사고방식으로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현대를 사는 우리들도 여백을 남겨놓는 것에 익숙하지 못합니다. 빈 곳이 있으면 안달하면서 무엇으로든지 그곳을 채워 넣어야 안심이 됩니다. 여백을 남겨놓는 것은 허술해 보이고, 만족스럽지 못하고, 때로는 창피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2010년 경인년이 이제 마지막 날을 맞았습니다. 올해 초 새해를 맞아서, 범띠인 저는 표범처럼 포효하며 힘차게 한 해를 살기로 결심했었습니다. 하지만 그 동안 지나온 발자취를 돌아보니 여기저기 허술하기 그지 없습니다. 아쉬움도 많이 남고, 조금 더 열심히 살아야 했다는 뉘우침도 생깁니다. 그렇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것들이 삶의 여백일 수 있습니다.
완벽한 인생길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인생을 여백 없이 가득 채우며 산다면, 그것 역시 숨막히는 일이겠지요. 인생길 이곳 저곳에 남겨진 여백을 바라보면서 마음 한 켠에 여유를 느끼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이라면, 자신이 남겨놓은 여백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채워주실 지 기대하고 기다릴 수 있습니다. 아니 남겨진 여백도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들 삶 속에 남겨진 여백 자체가 축복이고 소망임을 새삼 깨닫습니다.
구약 성경의 전도서 기자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렇다. 다만 내가 깨달은 것은 이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사람을 평범하고 단순하게 만드셨지만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복잡하게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전도서 7장 29절, 표준 새번역). 평범하고 단순하게 사는 인생은 여백의 미를 만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반면에 자신을 스스로 복잡하게 만드는 인생길은 왠지 모르게 숨이 막히고 나중에 허탈감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전도서의 일관된 가르침대로 우리의 인생길은 이십 보 백 보요 거기서 거기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송구영신의 계절에 우리의 삶에 남겨진 여백으로 인해서 아쉬워하거나 조급해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대신에 여백을 즐기고, 남겨진 여백이 새해에 어떻게 채워질 지 기대하면서 소망 가운데 새해를 맞기 원합니다.
하시용 목사/ 서머나 한인감리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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