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르치는 일 재미있어...벌써 66년이나 됐네”
뉴욕 한인 교육계의 거대한 산, 옆에 서기만 해도 넘치는 에너지를 나눠받을 수 있는 뉴욕한국학교 허병렬 이사장을 만났다. 맨하탄에 있는 작으나 따스한 그의 아파트를 찾아, 정 깊은 그의 마음과 소통하며 차 한잔을 나누었다.
▲어디에 가든 희망은 있어
막막한 미국땅에 우리말과 문화를 가져다 심어 한인들 가슴에 저마다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한 허병렬 (84)씨.평생 독신으로 살며 ‘한국말을 붙들고 살아온’ 그가 그동안 키워낸 1.5세, 2세들은 미 주류사회에서 늠름하게 제 몫을 하고 있거나 은퇴한 지금도 연말이면 ‘선생님 보고 싶습니다’는 카드를 보내오고 있다.“차를 타고 목적지를 향해 갈 때 개스를 넣어야 하고 톨 부스도 지나야 한다.
인생도 열심히 목적한 바를 향해 끝까지 재미나게 가야한다. ‘인생도처유청산(人生到處有靑山)’ 이란 사람이 사는 어디에 가든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미국에 사는 것에 대해 모국을 떠난 죄의식 같은 것을 지닌 사람도 있다. 어디에 살든지 미국에도 청산을, 희망을 만들면 된다. 한인이민자들을 보면 세계로 뻗어나가는 한국의 힘을 느낀다.”는 허병렬씨는 희망을 먼저 이야기 했다.18세에 종암초등학교 첫 교단에 선 이래 66년이상 현장에 있는 그는 지난 세월을 “별로 길지 않았다. 가르치는 일이 여전히 재미있다”고 말한다. 만일 그가 뉴욕에 오지 않고 한국에서 이름을 날리던 명교수가 되었더라면 우리들은 어쩔 뻔 했나 싶을 정도로 그의 족적은 깊고도 넓다.
▲여자도 일하는 시대가 올 것이다
1926년 1월 17일 출생, 3녀 중 맏딸로 유복하게 자라난 허씨는 ‘여자가 사회생활을 해야 남편을 이해한다, 여자도 경제력이 있어야 한다. 앞으로는 여자도 일하는 시대가 올 것이다.’는 아버지 허목씨의 조언대로 경성여자사범에 들어갔다. 허씨는 1944년 경성여자사범을 졸업하며 일본인 150명, 한국인 50명 총 200명 졸업생 중 1등을 했다. 그것은 ‘조국애라기보다는 그저 일본인에게 지지 않겠다는 마음이었다’고. 해방이 되자 한국어를 잘 모르는 딸을 위해 아버지는 손수 국어사전을 만들었다. 가나다라 순서로 틀리기 쉬운 단어를 모아서 만든 아버지의 국어사전을 보면 우리말을 공부했다.
해방 후 서울사범대학 부속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1960년 국비장학생으로 테네시 조지 피바디사범대학으로 유학와 학사학위를 받았고 다시 한국에 가서 이대부속초등학교에 근무했다. 그러다 64년 미국으로 온 것이 수천, 수만 명 뉴욕 어린이와 어른의 스승이 되었다.낮에는 미국유치원 교사, 밤에는 맨하탄 뱅크스트릿 교육대학원 석사과정, 주말에는 뉴욕한인교회와 퀸즈한인교회 한글학교 교사를 하던 중 73년 김홍준씨를 비롯 7인의 이사들과 뜻을 모아
브롱스 리버데일의 JFK 하이스쿨에 매주 토요일 뉴욕 한국학교 문을 열었다.
“영어만 잘해서는 안되고 한국말을 필히 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쳤다. 또 한글만 가르치면 별 효과가 없어 연극, 서예나 태권도, 한국무용 등 문화도 함께 가르쳤다”1980년에는 뉴욕한국학교에서 미주동북부지역 한국학교 관계자들을 초청하여 공개수업과 교사 연수회를 가졌고 이는 NAKS(National Association for Korean School)의 태동으로 이어졌다. 현재 낙스 연중 모임에는 전미주 1,000여개 한국학교에서 700~800명의 교사들이 모여 한국학 연구와 공부를 한다.
허병렬씨는 이 자리에 어김없이 나타나 스파르타식 강의를 밀고 나간다. 젊은 교사들이 자리라도 떠나려 하면 ‘강사료가 아깝지 않아요?’ 하면 다들 꼼짝 못하고 도로 주저앉는다.그는 틈틈이 총16권 이상의 한국어 교과서를 집필하거나 편집, 교육에 기여한 공로로 1984년 소수민족 우수인상, 1985년 제29회 소파상, 1989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석류장, 2004년 KBS 해외동포상 등을 수상했다.
▲결혼은 왜 하지 않았을까?
“일제하에 성교육이란 것도 없었고, 결혼을 해야 아이가 생긴다는 것을 몰랐다. 18세 때 결혼하고 싶은 남자가 있었다. 무척 존경했는데 어린 아기를 두고 상처한 분이었다. 평생 사랑을 주신 아버지가 아직 조선에는 서자나 두 번째 부인에 대한 편견이 있다며 우시더라. 그래서 포기했다.”고 오랜 독신생활을 정리하는 허병렬씨.오랜 과거사를 수줍게 말하다가 “여교사들만 있는 것보다 남교사들이 참여하는 회의의 분위기가 더욱 활기차고 결정적인 사안이 나온다”며 “나 남자 싫어해서 결혼 안한 것 아니에요. 남자 좋아해요” 조크를 던지며 파안대소한다.“내가 소망하는 것은 별로 크지않다. 바라는 바가 적기 때문에 크게 실망하거나 좌절할 일은 없다. 한번 목표를 정하면 질기게 추적하고 이루는 모든 과정을 즐긴다. 최선을 다했으면 결과에 별로 개의치않는다”고.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그는 맨하탄의 자그마한 원룸 아파트에 혼자 사는데 매일아침 11시 동네 맥도널드에서 한국일보를 보며 블랙퍼스트를 먹는다. 94년부터 현재까지 한국일보 고정칼럼니스트로써 신문에 대한 애정이 대단하다. “뉴욕이 좋다. 10년전부터 갤러리가 많은 첼시에 사는데 아주 만족하고 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전철을 타고 다닌다. 지그재그로 도로를 돌아서 길가 상가와 쇼윈도우를 구경하며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는 허병렬씨는 작년9월 뉴욕한국학교 교장 자리는 물러났지만 여전히 토요일이면 한국어초급, 학부모연극반, 한자 등 하루 4시간 꼬박 가르치는 현재진행형 일선 교사로서의 삶을 사랑한다.“애들과 함께, 끝까지 아프지 않고 살다 갔으면 좋겠다”는 그에게 여전히 삶은 맛있고 재미있고 무한하다. <민병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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