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트 이스트우드(85) 감독의 신작 ‘아메리칸 스나이퍼’가 비판받는, 더 적확하게 말하자면 ‘비난’받는 이유의 상당수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있을 것이다. 이스트우드 감독은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를 주인공 ‘크리스 카일’(브래들리 쿠퍼)의 실제모델인 미국 특수부대 네이비실의 저격수 크리스 카일(1974~2013)의 장례식 장면으로 대체했다. 미국은 ‘더 레전드(The Legend)’로 불린, 미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저격수였던 이 군인의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렀다. 그의 관은 성조기로 덮혀 있고, 시민들은 그의 관이 거리를 지나가자 멈춰서 묵념한다. 동료들은 그를 향해 거수경례를 하고 예포(禮砲)를 쏜다.
이 장면은 일부 국내 영화팬의 반발을 샀다. ‘뻔한 미국 만세 영화’라거나 ‘국방부 홍보영상’ ‘전쟁 미화 영화’라는 게 이유였다. 지난달 14일 국내 개봉한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1일 현재 국내 박스오피스 11위, 누적관객은 30만명을 조금 넘겼다. ‘국제시장’(감독 윤제균)이 관객을 싹쓸이하는 동안 노장 감독의 신작은 큰 이슈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1일 현재 북미 박스오피스 1위다. 2300억원이 넘는 누적수입을 기록 중이다. ‘리미티드 릴리즈(Limited Release)’(흥행 성적에 따라 상영관을 늘려가는 방식)로 개봉한 영화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이스트우드 감독의 최고 흥행작이 됐다.
상황이 이렇다고 해서 미국인들이 이 영화를 향해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더 크고, 강력한 비판 여론에 시달린다. 마치 ‘국제시장’을 두고 국내에서 벌어진 이념 논쟁과 비슷한 양상이다.
‘아메리칸 스나이퍼’에 대한 미국인들의 비난은 한국팬들이 보인 반응과 비슷하다. “군국주의 시각의 위험한 영화"(허핑턴 포스트) “이 영화를 보려고 줄을 선 사람들은 티파티 같다"(하워드 딘 전 버몬트 주지사) “등 뒤에서 총을 쏘는 저격수는 겁쟁이일 뿐 영웅이 아니다"(마이클 무어 감독) 등과 같은 반응이다. 보수언론은 반격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카일을 보내주신 걸 감사하게 되는 수작."(폭스뉴스 라디오)그렇다면 어느 쪽 말이 맞는 것일까.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극우주의 영화인가. 그게 아니라면 전쟁영웅(이라고 불리는 군인에 대한)에 대한 극진한 헌사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진보와 보수가 이 영화를 보는 시각 모두를 기각하고 ‘아메리칸 스나이퍼’의 바로 그 마지막 시퀀스를 다시 해석함으로써 이스트우드 자신도 모를 수 있는 이 영화의 진짜 의미에 다가가 보려고 한다.
‘아메리칸 스나이퍼’가 극우주의나 군국주의 혹은 이른바 ‘미국만세’라는 표현으로 불리는 미국 중심의 세계관을 가진 영화가 아니라는 점은 쉽게 반박할 수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아메리칸 스나이퍼’에는 그런 표현이 없다. 외려 영화는 전쟁에 비판적이고 미국의 행태와 행보에 비관적이다.
카일이 첫 번째 파병 첫 번째 임무에서 저격하는 첫 번째 적은 소년이다. 소년은 대전차 수류탄을 들고 있다. 그는 품 안에 수류탄을 숨기고 전진하는 미군을 향해 뛴다. 이 소년을 죽이지 않으면 아군이 막대한 피해를 본다. 카일은 어쩔 수 없이 방아쇠를 당긴다. 멍하게 막사에 앉아 있는 그를 향해 동료가 말한다. “네가 쏘지 않았으면 우리가 죽었을 거야."‘아메리칸 스나이퍼’의 군인들은 전쟁을 즐기지 않는다. 그들은 언제나 차분하고 조금은 우울하다. 이런 그들이 살상에서 쾌감을 느끼지는 않을 터. 영화의 전투 장면에는 긴장감이 가득할 뿐 승리의 기쁨 같은 가벼운 감정은 없다. 함께 참전한 카일의 동생은 카일에게 말한다. “그곳은 지옥이야."동료를 위해 복수에 나서는 카일의 모습을 두고 전쟁을 정당화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하기도 한다. 카일과 동료들이 복수를 마친 뒤 처한 상황은 무엇인가. 건물 옥상에 갇혀 포위해 들어오는 적을 무기력하게 바라보는 일이다. 그때 카일은 아내에게 전화해 울먹이며 말한다. “이제 집에 갈 준비가 됐어.(I‘m ready to go home)" 카일은 복수했지만 다른 동료들을 위험에 빠뜨린다. 이 장면은 자충수에 빠진 미국의 모습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이 전투에서 살아남은 카일은 전역한다.
네 번의 파병 사이사이 카일의 모습은 어떠한가. 그는 영웅의 모습이 아니다. 그는 최고의 군인이지만 최악의 가장이다. 임신한 자신의 아내를 제대로 보살피지 못하는 남자다. 영웅의 삶을 즐기는 인물도 아니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살려줘서 고맙다는 참전용사를 만났을 때도 텅빈 표정으로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다. 전쟁터로 가기 전 애국심으로 똘똘 뭉쳤던 그의 정신은 무너졌다. 전쟁은 애국심과 함께 다른 감정마저 무너뜨린다.
화려한 전공을 세운 카일이 집 안에서는 그토록 무기력한 이유는 상징적이다. 이스트우드는 모두가 영웅이라고 말하는 카일을 미국으로 형상화해 이 나라가 2001년 9.11 테러 이후 진행했던 전쟁을 돌아본다. 실제로 미국은 이 전쟁에서 이기지 못했다. 지난한 싸움은 여전히 계속되는 중이고 미국과 미국민은 이미 피로감을 보이고 있다. 은퇴한 카일이 전쟁의 여파에서 조금씩 빠져나오자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와서 기뻐"라고 말하는 대목은 의미심장하다.
‘아메리칸 스나이퍼’ 어디에도 전쟁과 미국을 찬양하는 내용은 없다. 오히려 이스트우드 감독은 미국 일부 보수주의자들의 싸구려 애국심을 차분히 꾸짖고 전쟁을 무겁게 비판한다. 그는 미국의 영웅을 통해 미국을 걱정하고 세계를 근심한다. 이스트우드 감독이 2008년 내놓은 ‘그랜 토리노’가 한 사회의 어른이 보여줘야 하는 책임감을 뼈저린 반성과 희생으로 짚은 작품이라면,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다는 기득권 국가가 갖춰야 할 위엄에 관해 이야기한다.
이스트우드 감독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카일이 전쟁 때문에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를 앓는 참전용사의 재활을 돕다가 사격장에서 그가 쏜 총에 맞아 죽었다고 말한다.(이 또한 실제 카일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여기까지 보고 나면 진보, 보수 어느 쪽에서도 이 영화를 앞서 언급된 몇 가지 단어로 쉽게 판단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역시 크리스 카일의 실제 장례식 장면이다. 이스트우드 감독은 카일이 영웅이었다고 말하고 있을까. 단순히 ‘맞다’고 답할 수는 없다. 이 장면은 미국의 과오를 미국 스스로 잘라내게 하는 것에 가깝다. 그리고 영웅으로 불렸던 인물을 성대하게 장사(葬事)지내고 최대한의 예우를 갖춰 조문(弔問)함으로써 그들의 과오와 절연한다.
미국이 일으킨 전쟁, 그 모든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전부 옳은 것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트우드 감독은 충분히 반성함과 동시에, 전체 미국이 저지른 실수 속에서 영웅으로 불린 뒤 허무하게 죽은 카일의 장례식을 보여줘야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장례식 장면은 완전한 서사의 도약이다.
창작자의 손을 떠난 예술에 대한 감상은 오롯이 관객의 몫이다. 영화도 다르지 않다. 하지만 ‘감상’과 ‘판단’은 다르다. 정치와 정치인은 명명을 즐기고, 대중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콘텐츠를 진영 논리를 위해 쉽고 간단히 규정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이 거장으로 불리는 이유는 그의 뛰어난 균헝 감각 덕분이다. 그는 판단하지 않는다. 그의 영화도 그렇다. ‘아메리칸 스나이퍼’를 둘러싼 논쟁은 너무 쉬워서 무가치하다.
<손정빈 기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