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생’을 하면서 들었던 확신 한 가지가 있어요. 드라마는 힘든 일을 헤쳐나갈 때 나온다는 거죠. 샐러리맨들이 일 끝나고 술 마시고, 일 때문에 스트레스 받고 상사 욕 하잖아요. 이런 것들이 모두 일을 잘하기 위해서 헤쳐나가는 과정이니까, 그 속에는 드라마가 있을 수밖에 없어요."
윤태호(45) 작가는 27일 정오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2014 창조경제박람회’ 좌담회에서 ‘미생’을 기획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2012년 1월20일 웹툰 ‘미생’이 처음 세상에 공개됐을 때 이 만화의 성공을 점치는 사람이 몇이나 됐을까. 아무리 윤태호 작가의 작품이라고 해도 직장인의 일상을 다룬 평범한 이야기가 이토록 큰 대중의 관심을 받을 것으로 생각한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대부분 사람이 ‘만화’는 말 그대로 현실에 있을 수 없는 ‘만화 같은 이야기’를 담는 그릇이라고 생각했다.
’미생’은 이런 선입견을 비웃기라도 하듯 누적 조회수 10억뷰를 돌파하고 단행본은 나온 지 석 달이 채 지나지 않아 200만부가 팔렸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웹툰이었지만, ‘미생’은 최근 케이블 채널 tvN에서 드라마로 제작되며 다시 한 번 주목을 받았다. 22일 12회 방송분 시청률은 6.1%(닐슨 코리아 기준)다. 케이블 채널에서 방송되고 있다는 점, 시청률이 낮은 금요일과 토요일 밤에 방송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대단한 수치다. 단순히 시청률로 가늠하기 어려운 인기도 누리고 있다. 현재 한국 드라마계는 ‘미생’ 천하다.
윤 작가만 새로운 시도를 한 것은 아니다. ‘미생’이 웹툰으로써 최고치의 완성도를 갖추고 있으며,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라는 것은 이 작품을 본 사람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었다. 문제는 드라마로 만들었을 때 과연 재미있을까 하는 점이었다. 비범하지만 평범한 이야기에 소위 ‘막장 드라마’의 자극에 길든 시청자가 움직일까 하는 점이 문제였다. 하지만 tvN은 도전했다. 된다고 믿었다.
“전 사실 처음에 반대했어요. ‘미생’이 좋은 작품이라는 건 알았지만, 한국 드라마 스 타일로 만들면 매력이 반감될 거라고 봤거든요. 욕만 먹을 거로 생각했죠. 그런데 반대로 반드시 ‘미생’을 드라마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철저한 공감 때문이었어요. 시청자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열망이 들었어요. 그래서 윤태호 작가님을 찾아갔죠."
이재문(37) PD의 말처럼 ‘공감’은 ‘미생’의 가장 큰 힘이다. ‘미생’을 본 모두가 한목소리로 말한다. “정말 내 이야기 같아." 비단 주인공 장그래에게만 감정이입을 하는 건 아니다. 누군가는 김 대리에게 또 다른 누군가는 오 차장에게, 어떤 이는 김 부장 또 다른 이는 장백기를 자신으로 여긴다.
이러한 공감은 우연이 아니다. 윤태호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인간의 보편적인 감성을 담으려는 노력"이라고 표현했다. 어떤 인간형을 그리느냐, 그리고 그 인간이 어떤 보편성을 가진 인간이냐를 가장 먼저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미생’의 인물들이다.
“보편성이라는 건 어떤 표준화된 타입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나만의 개성을 통해서 누구나 공감하는 이야기를 해야죠. 누구나 아는 것을 뻔하게 보여주는 건 동어반복에 불과합니다."
윤태호 작가가 미생을 기획하고 연재를 종료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자그마치 4년7개월이다. 바둑을 공부하고, 기원 연구생을 만나고, 무역상사를 취재하고, 취합한 정보로 드라마를 만든 뒤 다시 웹툰화 했다. 하나의 컷도 쉽게 그리지 않는 게 윤태호 작가의 방식이다. 전작인 ‘이끼’는 기획에서 연재 종료까지 5년이 걸렸다. 이런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대중의 격한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원작이 좋다고 드라마가 반드시 성공하지는 않는다. 웹툰을 원작으로 한 허다한 영화와 드라마가 실패했다. 강풀의 웹툰은 여러 차례 영화화됐지만 대부분 실패했다.
“사실 저희가 윤태호 작가님에게 많은 도움을 받지는 못했어요. 윤 작가님이 다른 작품을 준비 중이셔서 바빴거든요. 저희도 윤태호 작가님이 가신 길을 그대로 따라갔죠. 바둑 기사를 찾아다니고, 무역상사 직원을 만났어요. 보조 작가 2명을 상사 인턴으로 취직시켜 취재를 시키기도 했죠. 그렇게 하기 시작하니까 디테일이 달라지더라고요."
이재문 PD 이하 제작진은 취재하면서 놀랐다고 한다. 하나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윤 작가가 어디까지 취재를 해나갔는지 직접 해보면서 알게 됐다. 윤태호 작가는 “힘들었을 거다. 제가 도움을 드린 게 전혀 없다"며 “웹툰을 드라마로 만드는 건 완전히 또 다른 작업"이라고 이 PD의 말을 거들었다.
드라마 ‘미생’ 제작진에게도 목표가 있었다. 두 세 명의 주인공이 주로 등장하는 보편적인 드라마 형식이 아닌 ‘원 인터내셔널’이라는 대기업 자체가 주인공인 드라마로 만들겠다는 게 그들의 지향점이었다. 이 PD는 “웹툰 ‘미생’에는 등장했다 사라지는 캐릭터가 많다. 하지만 드라마는 그렇게 만들 수가 없다. 그러면 시청자들이 불편해한다"고 했다. 이런 점을 보완하기 위해 드라마 제작진이 한 일은 바로 캐릭터를 키우는 일이었다.
“캐릭터의 질감을 더 도드라지게 만들 수 있는 정윤정 작가를 영입했어요. 원작에서 한석률이나 장백기, 안영이는 드라마만큼의 비중을 가지지는 않죠. 하지만 인물의 크기를 키움으로써 그들이 저절로 성장하게 하고, 그 과정에서 그들끼리의 오해나 갈등을 소소하게 깔았던 거죠."
이제 ‘미생’은 원 소스 멀티 유즈(One Source Multi Use)의 대표적인 사례가 됐다. 웹툰과 출판물, 드라마, 캐릭터 상품, 광고협찬사까지 모두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
윤태호 작가는 “내 작품이 다른 식으로 소비된다는 것을 경계하거나 터부시할 필요는 전혀 없다"면서도 “단순히 어떤 결과를 바라고 접근하면 실패할 확률이 높다"고 말했다. 그는 “우연에 기대는 게 아니라 내가 왜 이 일을 열심히 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게 중요하다. 자신의 세계에서 온 힘을 다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재문 PD 또한 “웹툰이 드라마화나 영화화를 의도하는 순간 티가 나고 그런 작품은 다른 방식으로 소비하기 어렵다"고 했다. “콘텐츠가 매력 있고, 충실하다면 자연스럽게 드라마화되고 영화화될 것"이라고 답했다.
이날 좌담회에서 윤태호 작가는 “세계적인 보편성을 가진 작품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 작가의 말처럼 ‘미생’은 해외 각국에 판매될 것으로 보인다. 이재문 PD는 “아직 확정된 게 없다"고 조심스러워 하면서도 “중국, 미국 등 다양한 국가에서 판권 판매나 리메이크 제의가 들어오고 있다"고 전했다.
윤태호 작가는 “이 모든 상황이 감격스럽다"며 "시청자에게 감사하고, 제 작품을 위해 뛰어준 모든 분에게 고맙다"고 인사했다.
이재문 PD는 “저희처럼 다르게 가보려는 시도가 용인되고 이런 의지를 용인하는 풍토가 자리 잡는다면 더 좋은 작품이 많이 나올 것"이라고 짚었다.
윤태호 작가는 현재 ‘미생 시즌2’를 기획 중이다. 내년 3월부터 연재를 하는 게 목표다. 이재문 PD는 시즌2 또한 드라마로 만들 생각이 있다고 말했다.
<손정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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