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아웃’ 부르는 노동환경
▶ 일상화된 극한 스트레스
바쁘지만 허망하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여전히 그 자리다. 노동환경이 급변하는 시대에 번아웃(burnout)은 노동 강도가 센 직장뿐 아니라 웬만한 업종에서 흔하게 일어나는 사회현상이 됐다.
미국의 심리학자 크리스티나 매슬랙은 산업구조와 근로환경 변화로 번아웃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다며 정서적 소진, 비인격화, 자아 성취감 저하를 원인으로 꼽았다. 정신건강을 위해서는 적당한 업무량, 자율성과 권한, 보수와 인정, 조직 분위기와 동료애, 투명성과 공평함, 일의 가치와 의미부여 등이 필수적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장시간 근로와 고용의질 악화라는 이중고에 시달리는 한국의 직장인은 관리조차 되지 않는 번아웃의 사각지대에 있는 셈이다.
■서비스 업계에서 특히 취약
서비스업은 업무 강도는 세지만 보상은 적고정신적 스트레스가 심해 특히 번아웃에 취약하다. 육체적 무리뿐 아니라 인격무시, 욕설, 무리한 요구에 시달리다 보면 속병이 들 수밖에없다.
2년 차 마트 계산원 D(45)씨는 고객 유모차에 담겨 있는 먹다 남은 과자와 생수병에대해 물었다가 봉변을 당했다. 고객은 기분이 상했다며 언성을 높였고, 결국 D씨는 무릎을 꿇고 사과하는 수모를 겪었다. 온 몸에힘이 다 빠져 동료의 부축을 받으며 겨우 퇴근한 D씨는 수면장애에 출근도 하지 못할정도로 불안과 분노가 커져 신경정신과를찾았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진단을 받았다.
고객응대 업무에 종사했던 콜센터 직원C(34)씨는 극심한 스트레스를 견디다 못해회사 내에서 다량의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기도했다. 5년을 근무한 베테런이었지만 고객의 욕설과 폭언 등에 시달리면서 콜을 받다가 중간에 졸도하는 등 상태가 악화했다.
상담치료까지 받았지만 결국 회사를 그만뒀다.
사회복지 공무원들은 격무와 직무 스트레스에 10명 중 4명이 번아웃 상태로 심리상담을필요로 한다는 조사결과도 있다. 4명 중 1명꼴로 자살충동을 느꼈다. 노동환경건강연구소가2013년 약 6,000명을 설문한 결과로 중증도우울상태가 23.7%(1,367명), 심한 우울상태도14.2%(822명)나 됐다.
윤진 중앙자살예방센터 팀장은 “자살기도자나 위험한 수위에 있는 사람들을 상담하는업무를 하다 보면 스트레스 지수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며“ 힘든 여건에서 분투하는 상담사나 사회복지사에게 번아웃 증상이 자주 나타난다”고 했다. 최근 고용노동부는 산재보상법시행령ㆍ시행규칙 개정안을 통해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만 산재 판정을 하다가 서비스 노동자의 우울증까지 범위를 넓혔다. 고객응대 업무를맡고 있는 근로자의 정신질환 사례가 늘어났기때문이다.
■24시간 대기, 직장인은 피곤하다
근로환경의 변화 가운데 가장 큰 스트레스요인이 되는 것은 휴대전화다. 불시에 걸려오는회사나 상사의 전화에 깜짝깜짝 놀라는 직장인이 적지 않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지난해 발표한 ‘정보통신 기기에 의한 노동 인권침해 실태조사’에따르면 직장인 3명 중 2명(63%)은 업무시간외에도 모바일 메신저로 업무 연락을 받은경험이 있었다. 88%는 연락받은 즉시 그 업무를 처리했고, 60%는 다시 복귀했다고 답했다. 퇴근 후에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환경에노출돼 온전히 쉴 수 없으니 정신건강이 피폐해질 수밖에 없다.
업무시간과 자유시간이 엄격히 구별되지않다 보니 일에 대한 집중력은 현격히 떨어진다. 직장인 상당수가 업무시간에 개인 블로그를 하고 인터넷 샤핑을 즐기는 등 이른바딴 짓을 하는 것도 결국 장시간 근로가 원인일 수 있다. 긴장을 오래 지속할 수 없어 이를 해소하기 위한 일종의 반작용이라는 것이다.
지난해 프랑스 경영자 총연합회와 노동계는 퇴근시간인 오후 6시부터 다음날 9시 출근 때까지 업무와 연관된 전화나 이메일을주고받는 것을 금지했다. 여가 보장은 물론온전한 휴식을 보장하는 게 근무시간 내 업무 효율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감안한 합의였다.
■가장 오래 일하는 한국
은행원으로 3년간 일한 B(31)씨는 최근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공무원 시험 준비를하고 있다. 일찍 출근해 은행 문을 열어야 하는 데다 3년 동안 정시에 퇴근한 적이 거의없었다. B씨는 “솔직히 연봉도 괜찮고 다른일자리 구하기가 쉽지 않아 망설이긴 했다”며 “연차가 올라갈수록 실적 압박도 크고 무엇보다 야근이 일상화돼 주중에 나만의 시간을 낼 수 없다는 점을 참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한국인의 근로시간이 선진국 중 최장이라는 사실은 해묵은 이야기지만 개선될 여지는없다. 2014년 한국 직장인의 노동시간도 연간 2,285시간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34개 회원국 중 가장 길었다. OECD 평균(1,770시간)보다 515시간이나 초과했다. 독일(1,371시간)보다는 1.6배나 더 일해 날수로따지면 114일이나 된다. 미국도 근로시간이1,789시간으로 일본(1,729시간)이나 스페인(1,689시간)보다 많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의 ‘연장 근로시간 제한의 고용효과’ 보고서에 따르면 주 40시간인법정 근로시간 외 연장근로 허용시간(주 52시간)까지 초과한 노동자는 357만명이었다. 전체노동자 5명 중 1명꼴이다.
장시간 근로가 업무효율을 높이는 것도아니고 오히려 생산성을 떨어뜨리지만 회사에 오래 남아 있는 게 열심히 일하는 것으로 인정받는 후진적 시스템이 계속되고 있는 결과다. 정진주 사회건강연구소 소장도“ 하루 8시간 노동으로 규정한 데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며 “ 장시간 근로로 긴장이 계속 지속될 경우 번아웃은 피할 수 없는 귀결”이라고 분석했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