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량을 구하기 위해 두만강을 건넜던 탈북 소년이 변호사를 꿈꾸는 의젓한 청년으로 성장했다. 오는 2월 연세대학교 법대를 졸업하면 경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에 다시 입학할 예정인 이영수(28)씨. 그는 앞으로 북한 인권전문 변호사가 될 생각이다.
1983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난 그는 6세에 아버지를 잃었다. 어머니, 형과 함께 농사를 짓고 행상을 하며 모진 고생을 해야 했고 1990년대에 북한에 닥친 식량난도 고스란히 몸으로 겪었다. 동생과 옥수수빵을 팔러 다니느라 결석을 밥 먹듯 했고 학교 갈 힘이 없어 가지 못한 날도 있었다. 먹을 것을 얻기 위해 황해도 사리원으로 무작정 떠났지만 자신의 모습은 결국 구걸하며 돌아다니는 ‘꽃제비’들과 다를 게 없었다. 1997년 외삼촌과 다시 탈북을 감행했지만 불행하게도 외삼촌은 장마로 불어난 강물에 목숨을 잃었다. 먹고 살기도 힘들어 공부는 거의 포기했다.
모든 상황이 절망적인 상태에서 그의 삶을 180도 바꿔놓은 건 한인 선교사다. 워싱턴에서 서점을 운영하며 탈북자 지원 선교기관 ‘땅끝선교회’ 대표로 활동했던 은춘표 장로가 그 사람이다. 은 장로는 이씨가 몽골을 통해 탈출하고 2002년 한국에 들어오는데 도움을 줬다. 이씨를 양아들처럼 여기고 있는 은 장로는 이씨가 워싱턴에서 일년간 노던 버지니아 커뮤니티 칼리지에 다닐 수 있도록 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도 이씨는 로스쿨을 다닐 만한 여력은 전혀 없다. 다만 맨 손으로 북한에서 나와 여기까지 온 것처럼 분명히 뜻을 세운 사람에게 길이 열릴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 또 한 가지 문제는 북한이 개방되기 전까지는 북한 주민들을 위한 직접적인 인권 옹호 활동을 사실 불가능하다는 사실. 그때까지 제3국에 있는 탈북자들의 난민 지위 획득을 국제사회에 호소하고 한국 내 탈북자들에게 법적 도움을 주는 등의 활동에 주력할 계획이다.
학생 신분인 현재도 그는 수잔 숄티 북한자유연합 회장이 한국에서 개최한 북한자유주간 행사에 적극 참여해왔고 교내에 북한인권옹호 클럽을 만들어 뜻을 함께 하는 친구들과 힘을 모았다.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사건 등으로 이제 젊은이들이 북한을 더 이상 동반자로만 보지 않는 것 같다”는 이씨는 “북한 자유화를 위해서는 아무래도 주민들의 의식이 먼저 바뀌어야 하는데 김정은을 서슴없이 비판하는 분위기라는 소문을 보면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느낌도 든다”고 말했다. <이병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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