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로버트와 팀 샘소는 샌타애나 법정 3번째 줄에 함께 앉아있다. 되살아나는 악몽과 슬픔을 함께 나누며. 1979년 바닷가에 놀러갔던 그들의 어린 여동생을 죽인 것으로 알려진 살인범은 몇 피트 저편에 앉아있다. 이 사건에 대한 3번째 재판이다. 지난 30년동안 로드니 제임스 알칼라(66)는 로빈 샘소(당시 12세) 살해혐의로 2번의 재판에서 각각 사형언도를 받았었다. 그러나 두 번 다 항소심에서 번복, 재심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25일의 3심에서 다시 유죄평결이 내려졌다.
한 가정을 뿌리째 뒤흔든 12세 소녀 피살사건
사형선고 두 차례나 번복… 3심서 다시 유죄
첫 번째 재판 때 로버트와 팀, 두 오빠는 14세와 16세의 틴에이저였다. 두 번째 재판 때는 막 자립 생활을 시작한 청년들이었다. 그리고 이제 44세와 46세의 중년이 되어 이들은 다시 법정에서 3심을 지켜보고 있다. 로버트는 5명 자녀의 아버지가 되었고 팀도 그동안 끝없이 되풀이되어 온 증언과 논쟁을 함께 견디며 동행해 준 오랜 친구 테레사와 결혼해 두 딸을 두었다. 이들의 자녀 어느 누구도 친구들과 바닷가에 놀러가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 긴 세월 중 때로는 포기하고 싶은 때가 있었다. 그러나 로빈을 위해 법정에 나와야 한다는 필요성은 언제나 그들을 압도했다. 오렌지카운티 지방법원에서부터 LA와 패사디나, 샌프란시스코의 항소법원 등으로 그들은 사건을 따라 다녔다.
이미 그들의 가슴 속에 각인된 사건의 상황을 반복해 들어야 했다. 로빈의 작은 몸이 어떻게 잘려지고 부패된 채 숲 속에서 발견되었는가를 다시 들었고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점점 나이 들어가며 기억력이 희미해져가는 증인들을 다시 지켜보았다.
이번 재판에선 알칼라가 스스로의 변호인 역할까지 맡아 로빈의 어머니를 포함한 증인들을 반대심문하며 판사 및 검찰 측과 법정 절차에 대해 토의를 하고 있다.
이번 재판은 좀 다르다. 알칼라는 또 다른 4명 여성들을 고문하고 살해한 혐의에도 유죄평결을 받았다.
이혼 후 새생활을 시작하려는 매리앤 코넬리가 두 딸과 두 아들을 데리고 위스콘신의 추위를 피해 캘리포니아로 이사한 것은 1977년이었다. 그들은 헌팅턴비치에 정착했다.
1979년 6월20일, 작은 딸 로빈은 친구 브리젯과 함께 바닷가에 놀러갔다. 한 남자가 소녀들에게 다가와 사진을 찍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얼마후 로빈은 브리젯의 자전거를 빌려타고 발레 클래스로 향했다. 로빈의 사체는 두 주후 앤젤레스 내셔널 포레스트에서 발견되었다.
로드니 알칼라는 소녀들에 대한 폭행전과를 가진 사진사였다. 1972년 할리웃에서 8세 소녀를 납치, 강간, 치사에 가까운 폭행등으로 유죄평결을 받고 복역하다 2년 후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얼마후 납치한 13세 소녀와 마리화나를 흡연하다 체포되어 감방으로 되돌아갔으나 1977년 다시 석방되었다. 로빈의 실종 무렵 그는 15세 소녀 폭행 및 강간 혐의로 재판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후 유죄평결을 받았다.
그의 집행유예 담당관이 바닷가에서 로빈에게 접근했던 사진사의 몽타주를 보고 경찰에 알칼라에 대해 알렸다. 검찰은 로빈의 가족들에게 재판은 문제없다고 장담했다.
첫 번째 재판이 시작된 것은 로버트가 헌팅턴비치 하이스쿨에 막 들어간 때였다. 형 팀은 아버지가 데려가고 누나는 독립해 나갔다. “북적거리던 대가족에서 갑자기 엄마와 나, 단 둘만 남게 되었지요” 사건 재판에 대해 끊임없이 물어대는 교사들로 인해 그의 학교생활은 더욱 힘들었다. 그해 그가 학교에 간 날은 23일에 불과했다.
재판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로빈 살해와 연관된 알칼라에 대한 증거는 대부분 정황적인 것이었다. 로빈의 친구 브리젯과 바닷가에서 카메라 가진 남자를 보았다는 사람들이 검찰의 증인들이었다. 로빈의 사체가 발견된 인근에서 로빈과 함께 있는 알칼라를 보았다는 다나 크라파는 상당히 유력한 증인이었지만 증언대에 선 그녀의 말과 행동은 일관성이 없어 후에 오히려 불리하게 작용했다. 검찰은 소녀들에 대해 납치, 강간, 폭행을 가한 알칼라의 전과를 집중 공격했다.
결국 유죄평결을 받은 알칼라에게 로빈 실종 1년만에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슬픔과 상처는 아직 생생했지만 가족들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로빈은 영원히 사라졌고 가정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지만 가족들은 제각기 부서졌던 삶을 꿰맞추며 일상으로 돌아가려고 노력했다. 로버트는 어선에서 일했고 팀은 목수 일을 하며 용접학교에 다녔다.
그러나 4년 후 이들은 캘리포니아주 대법원이 알칼라의 유죄평결을 번복시키고 재심을 명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의 전과를 증거로 제출한 것이 배심원에게 편견을 갖게해 공정한 재판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가족들의 일상은 다시 흔들렸다. 어머니 매리앤은 번복 판결을 내린 판사소환 운동에 뛰어들었고 분노한 두 오빠들의 생활은 망가지기 시작했다. 매일 술마시고, 울고, 싸우고, 유치장에 들어가고의 연속이었다. 샌쿠엔틴 교도소에서 있던 알칼라가 재심을 받기위해 오렌지카운티로 이송된다는 소식을 들은 형제들은 감옥에서 알칼라를 혼내주기위해 고의로 체포되자는 모의까지 했었다. “그때 우린 젊었으니까요”라고 로버트는 말한다.
1986년 열린 재심에도 물증의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배심원들은 다시 유죄평결을 내렸고 알칼라는 다시 사형선고를 받았다.
방황하던 젊음의 시기를 벗어나 자녀를 둔 가장으로 안정되어가던 로버트와 팀에게 알칼라의 유죄평결이 또 번복되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2001년, 다시 길고 지루한 법정 공방이 시작되었다. 지난 5년 이들을 수없이 많은 날들을 11층 샌타애나 법원건물에서 보내야 했다.
3번째 재판에서 검찰은 18~32세 4명의 여성에 대한 성폭행 살인사건과 관련해 알칼라의 유전자, 혈액, 지문 등 확실한 물증을 제출했다. 로빈의 사체는 발견당시 너무 부패해 사인과 성폭행 여부조차 가릴 수 없을 정도였다.
이제 재판은 거의 막을 내리고 있다. 지난 30년 끊임없이 가족들을 괴롭힌 사건의 망령도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다. “거의 끝났으니, 기쁘지 않아?”라고 사람들은 위로의 선의를 담아 묻는다. 정말 그럴 수 있을까, 로버트 샘소에겐 아직 확신이 생기지 않는다.
샌타애나 법정 밖에서 누이동생 살해용의자에 대한 3번째 재판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팀(왼쪽)과 로버트 샘소 형제. 25일 3심에서 유죄평결을 받은 범인에 대한 형량선고는 다음주 내려진다.
12세때 피살된 로빈 샘소.
살해용의자 로드니 알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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