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플레이션 공포..아시아 경기하강 장기화 우려
(뉴욕=연합뉴스) 김현준 특파원 = 금융위기가 세계 경제를 동반 침체로 이끌면서 90년대 일본과 같은 ‘잃어버린 10년’이 미국을 비롯한 세계를 덮칠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금융위기를 촉발한 미국이 심각한 소비 위축으로 상품이 팔리지 않아 가격 하락의 소용돌이에 빠지는 디플레이션에 직면할 가능성이 있고, 아시아 등 신흥시장도 미국과 유럽 등 주요 수출시장의 침체로 판로가 막히면서 90년대말 금융위기 때와는 달리 오랜 침체를 겪어야 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아시아 금융위기의 경우 미국 등 주요 선진국 경제권이 버텨주면서 이들 국가에 대한 수출로 신흥시장의 경제가 빠르게 회복됐지만 이번에는 금융위기로 미국은 물론 전세계 경제가 동시에 어려움에 직면했다는 점에서 상황이 달라진 것이다.
◇ 美 디플레로 ‘잃어버린 10년’ 오나 = 미국의 3.4분기 경제성장률은 소비지출이 17년만에 처음 3.1%나 줄면서 0.3% 감소해 경기침체가 기정사실화되고 있다.
특히 소비의 위축은 상품의 재고를 쌓이게 함으로써 가격 하락을 유발하고 기업의 투자 위축과 감원을 불러와 소비를 더 줄이게 하는 악순환으로 불러올 위험을 키우고 있다. 가계사정 악화에 따른 미국의 소비의 위축은 최근 몇년간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20%의 고성장을 하던 유기농 제품의 판매가 닐슨컴퍼니의 조사에서 9월에 4%의 증가로 크게 둔화된 것에서도 확인된다.
이와 관련, 뉴욕타임스(NYT)는 1일 많은 국가들에서 금융위기가 심화되면서 미국 경제가 디플레이션이에 빠질 수도 있다는 새로운 위협이 불거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디플레이션은 1930대 대공황 때 나타났었고, 90년대 일본도 디플레이션으로 ‘잃어버린 10년’을 겪었다.
몇개월 전만에도 미국 등 세계 경제는 국제유가 등 원자재가격의 초강세 속에 인플레이션을 걱정했지만 갑자기 사정이 바뀌었다. 세계적 경기침체 우려가 국제유가를 10월에만 33% 급락하게 하는 등 원자재 가격이 폭락하고 다른 상품.서비스 가격도 아직 큰 폭은 아니지만 내릴 조짐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물가 상승률은 7월에는 1년전 보다 5.6%에 달했지만 9월에는 4.9%로 떨어졌고 앞으로도 더 하락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디플레이션이 위험성은 이를 치유하기가 어렵다는데 있다. 인플레이션은 정책 당국이 금리를 인상함으로써 경제활동과 수요를 약화시켜 잡을 수도 있지만 디플레이션은 과거 일본에서 그랬던 것처럼 금리를 제로로 가져가더라도 단기에 해결되기 어려울 수 있기 때문이다.
디플레이션 우려를 이미 경고했던 뉴욕대의 누리엘 루비니 교수는 신문에 홍역이 심해지는 악순환에 빠질 수 있다며 디플레이션 위기에 직면했음을 설명했다.
많은 경제전문가들은 미국의 정책당국이 금리를 인하해 경제성장을 유지시킴으로써 디플레이션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금융위기가 세계로 번지면서 많은 국가가 동시에 어려움을 겪는 상황에서 미국 혼자만 경제를 살리기는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신문은 세계의 수많은 국가가 동시에 심각한 곤경에 처한 것은 대공황 이후 처음이라면서 미국이 부진한 내수 대신 수출로 경제를 살리려 해도 아시아 등 다른 경제권도 어려워 쉽지 않은 현실이라고 설명했다.
하버드대의 케네스 로고프 교수는 우리가 진짜 심각한 글로벌 경기침체에 진입하고 있다면서 위험은 몇년간의 나쁜 시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잃어버린 10년’을 겪을 수도 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 아시아 경기 하강도 오래 갈듯 = 아시아 국가들도 이번에는 90년대말 금융위기 때와는 다른 상황에 직면해 빠른 경제회복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10년전 아시아 금융위기 때는 미국을 비롯해 다른 선진국에 수출을 급격히 늘림으로써 아시아 국가의 경제가 빠르게 회복될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미국과 유럽 경제가 금융위기로 큰 고통을 겪어 수출을 바탕으로 한 회복을 기대하기 힘들게 됐기 때문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날 아시아 경제의 하강이 90년대말 처럼 심각하지는 않더라도 기간이 더 오래 지속되는 다른 양상이 나타날 것으로 우려돼 세계에 새로운 문제가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신문에 따르면 홍콩에서 펜과 야구모자 등 판촉물을 만들어 중국에 수출하는 업체의 사장인 헨리 파자라도는 작년에 1천100만달러에 달했던 매출이 60%나 줄었다면서 사업이 급속히 위축되고 있다고 말했다.
물론 아시아 국가의 경제사정은 대규모 경상수지 적자와 대외부채로 고전했던 10년전에 비해 많은 외환보유액을 확보하고 있는 등 건전해졌지만 한국과 인도 등의 경우처럼 통화가치가 금융위기 속에 급락한 것은 수입물가를 비싸게 만들어 소비를 위축시킬 우려도 낳고 있다.
또 사회기반시설 확충 투자를 늘림으로써 경기를 진작시킬 수도 있지만 세계 경제가 침체하는 상황에서 이것만으로는 수출 급증 덕에 2006~2007년에도 거의 8% 가까운 경제성장을 했던 급성장세를 회복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부동산 가격 하락에 따른 대출 부실 문제도 아시아 경제를 어렵게 할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ING의 이코노미스트인 팀 콘돈은 강한 수출 수요가 없는 상황에서 이번 경기하강이 보다 오래 갈 것이라는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아시아의 경제성장 약화가 장기화될 경우 아시아 국가가 대규모로 수입하는 콩과 원유 등 원자재 수요도 줄어 러시아와 브라질 등 원자재 수출국을 비롯한 세계 경제에도 타격이 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jun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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