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이다. 인연이 쌓이고 쌓여 뜻밖의 결과가 나오니 감개무량하다. '부산행' 이야기다.
연상호 감독과 처음 만난 건 2011년 부산국제영화제였다. 바쁜 일정에 몸도 마음도 지쳐있을 무렵, '돼지의 왕'을 늦은 저녁 만났다. 당시 극장을 찾은 관객들 상당수는 '돼지의 왕'이 '마당을 나온 암탉'처럼 동물이 등장하는 애니메이션인 줄 알았다. 앞자리에 앉아있던 노부부는 팝콘을 들고 "돼지들이 귀엽게 나올라나" "이거도 닭이 예쁘게 나오는 거랑 비슷하지 않겠어"라고 했었다. 노부부의 말을 기억하는 건, '돼지의 왕'이 시작되자 처음엔 당황하다가 어느새 스크린 앞으로 바짝 다가서며 집중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 워낙 인상 깊었기 때문이다.
엄청난 에너지. 지쳤던 기분이 단숨에 날아갔다. 연상호 감독을 다음날 바로 찾아갔다. 그렇게 연상호 감독과 인연을 맺었다. '돼지의 왕'을 워낙 강렬하게 본 터라 주위에 열심히 추천했다. 그 중 한 명이 한국영화 해외 배급사 화인컷의 서영주 대표였다.
부산국제영화제 기간 열린 필름마켓 화인컷 부스를 찾아가 '돼지의 왕'을 봤는지 물었다. "아직 안 봤다"는 서 대표에게 "해외에서도 잘 먹힐 것"이라며 오지랖을 떨었다. 이듬해 '돼지의 왕'이 칸국제영화제 감독주간에 초청된다는 소식도 알음알음 퍼진 차였다.
꼭 그 때문은 아니겠지만, 서 대표도 연상호 감독과 인연을 맺었다. 서영주 대표는 당시 '돼지의 왕' 이후 후속작으로 '사이비' 제작에 한창이던 연상호 감독에게 또 어떤 작품을 준비하고 있냐고 물었다. 리얼리즘 계열 애니메이션을 연달아 만든 연 감독은 그간 계속 생각해오던 좀비 소재 애니메이션을 기획하고 있다고 말했다. 바로 '서울역'이다. 해외에 좀비영화 시장이 분명하기에, 서영주 대표는 '서울역' 기획과 제작 투자에 참여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렇게 '부산행' 프리퀄인 '서울역'이 출발하게 됐다. 아직 NEW가 붙기 전이었다.
'사이비'를 배급한 NEW는 연상호 감독에게 깊은 신뢰를 드러냈다. NEW에선 '서울역' 기획을 듣고 아예 그 프로젝트를 실사영화로 만드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 했다. 하지만 연상호 감독은 이미 애니메이션으로 풀기로 한 이야기를 다시 실사영화로 만드는 건 의미가 없다며 거절했다. 차라리 '서울역' 뒷이야기를 실사영화로 만드는 게 어떻겠냐며 역제안을 했다. 서울역에서 부산으로 떠나는 좀비열차 '부산행' 기획은 그렇게 시작됐다.
'부산행'에 안소희가 탑승하게 된 것도 인연에서 비롯됐다.
'서울역' 제작이 궤도에 오르고 난 뒤 기자와 연상호 감독, 서영주 대표가 만났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서울역' 목소리 연기를 누가 하면 좋을까란 이야기로 옮겨갔다. 마침 기자는 좀비 마니아이기도 한 정욱 JYP엔터테인먼트 대표와 인연이 있었다. 목소리 주인공에 수지가 어떻겠냐고 추천했다. 연상호 감독은 수지가 '서울역' 가출 여고생 역할에 적합할까 고민하는 눈치였다. 그래도 내친 김에 정욱 대표와 자리를 주선했다.
결과적으로 수지 '서울역' 탑승은 무산됐다. 정욱 대표는 '서울역' 시나리오를 마음에 들어했지만 CF 이미지와 안 맞는다는 내부 반대에 부딪혔다. 그 역할은 심은경에게 돌아갔다. 만일 수지가 '서울역' 목소리 연기를 맡았다면 '부산행' 첫 좀비는 수지가 될 뻔 했다.
수지 출연은 무산됐지만 연상호 감독과 정욱 대표는 이후 두터운 친분을 쌓았다. 그렇게 맺은 인연은 안소희까지 이어졌다. 2015년 3월 정욱 대표 모친상 빈소에서 연상호 감독과 안소희가 만났다. 당시 안소희 소속사 BH엔터테인먼트는 '부산행'에 안소희를 적극적으로 밀고 있었다. 그렇지만 '부산행' 측에선 좀처럼 답을 주지 않았다.
사실 그 역할에는 소녀시대 서현이 내정돼 있었다. 서현은 연상호 감독과 대본 리딩까지 했었다. 그런데 소녀시대 해외 일정과 '부산행' 촬영 기간이 겹친다는 걸 알게 되면서 다른 배우를 찾던 즈음이었다. 안소희는 정욱 대표가 빈소에서 연상호 감독을 소개 시키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부산행' 정말 하고 싶습니다"라고 당차게 말했다. 낯가림이 심한 안소희 성격을 생각한다면, 연예인들도 많은 빈소에서, 그녀의 용기와 열정이 상당했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연상호 감독은 안소희의 그런 모습이 감명 깊었던 것 같다. 이틀 뒤, '부산행'쪽에서 BH엔터테인먼트에 안소희와 같이 하자는 연락이 갔다.
'부산행'이 지금이야 천만영화가 됐지만, 기획부터 출발까지 산 너머 산이었다. 한국에선 낯선 좀비 장르에, 애니메이션 감독이 처음으로 실사영화를 찍는 탓이었다.
캐스팅도 쉽지 않았다. 특히 공유가 맡은 주인공 역할이 어려웠다. 시나리오부터 마동석 역할이야 소위 따먹는 역할 인 반면 공유 역할은 주인공인데도 두드러져 보이지 않은 탓이었다. 그런 이유로 시나리오는 재밌지만 출연이 어렵겠다며 이병헌과 원빈 등이 고사했다. 연상호 감독 스스로도 "공유 역할은 배우가 안 붙을 줄 알았다"고 토로했다.
그러던 차에 제작사 레드피터 이동하 대표가 공유에게 '부산행'을 제안했다. 이동하 대표와 공유는 '남과 여'로 작품을 같이 했었다. 공유는 시나리오를 받은 지 이틀 만에 "오케이" 했다. 이동하 대표는 "공유가 시나리오 상 주인공이 안 보일 수도 있지만, 내가 안 드러나도 좋으니 영화가 끝나고 관객이 극장을 나설 때 먹먹할 수 있는 장르 영화로 만들어줬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공유가 '부산행'에 탑승하자 후속 캐스팅은 물 흐르듯 진행됐다.
'부산행'이 지금 모습으로 만들어진 건, 연상호 감독의 뚝심과 NEW 장경익 영화부문 대표의 신뢰가 맞아 떨어진 결과기도 하다. 순 제작비 85억원으로 만들어진 '부산행'은 처음에는 65억원 규모로 예정돼 있었다.
이동하 대표와 연상호 감독은 '부산행' 프리 프로덕션을 진행하면서 20억원만 더 들어간다면 훨씬 좋은 영화로 만들 수 있을 것 같다고 의견을 모았다. 이런 뜻을 전달했지만 NEW에선 난감해 했다. 한 두 푼도 아니고 20억원을 늘려 달라니, 다른 부분투자사까지 설득할 일도 까마득했다. NEW에선 '부산행' 제작사 레드피터에 왜 20억원이 더 필요한지 브리핑을 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연상호 감독은 "그냥 내가 갈게"라며 NEW 장경익 대표를 찾아갔다. 그 자리에서 연상호 감독은 "65억원으로 잘 만들 수 있는데, 20억원만 더 있으면 진짜 더 잘 만들 수 있을 것 같다"고 배짱을 튕겼다. 그의 배짱에 장경익 대표는 "오케이"라고 동의했다. 쉽지 않은 요청이었고,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그 덕에 지금 모습으로 '부산행'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부산행'은 연상호 감독과 이동하 대표 등 만든 사람과 공유를 비롯해 좀비 역을 맡은 이름 모를 배우들, 그리고 투자한 NEW 사람들의 노력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졌다. 그런 노력에 작은 인연이 얽었으니, 그저 경탄할 따름이다.
<스타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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