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우리 영화계에서 주인공을 맡을 수 있는 여배우는 한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다. 전도연, 손예진, 김혜수, 하지원 정도. 10년 전도 다르지 않았다. 손예진과 하지원을 빼고 세상을 떠난 장진영과 은퇴한 심은하 정도를 리스트에 넣을 수 있었다. 이은주의 등장은 그래서 반가웠다. 청순함도, 섹시함도 아닌 차갑고 이지적인 이미지를 가진 배우의 등장은 새로웠다. 그는 주연 여배우가 가져야 할 최고 덕목인 ‘배우의 분위기’를, 스무살 때부터 가지고 있었다.
2005년 2월22일, 배우 이은주가 스물다섯살의 나이에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대중은 그가 세상을 저버릴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외모와 연기력 모두 인정받으며 한국영화계를 이끌 재목으로 촉망받던 여배우가 그런 선택을 해야 할 이유는 없어 보였다. 그의 죽음은 일렀고 그래서 더 당황스러웠다.
그래서인지 유독 이은주를 기억하려는 이들이 많다. 조·단역으로 출연한 작품까지 모두 더해 드라마 5편과 영화 10편이 그가 출연한 작품 전부이고, 고작 6년이 그가 활동한 기간이지만, 대중은 그가 연기한 시간보다 더 오랜 세월 이은주를 그리워한다. 올해 2월22일은 이은주가 우리와 작별한지 10년째 되는 날이다. 매년 그를 기리는 행사를 진행해온 소속사 나무액터스는 10주기를 맞아 특별한 추모 행사를 계획 중이다. CGV 아트하우스와 함께 ‘故 이은주 추모 10주기-이은주 특별전’을 진행하고 그를 아꼈던 팬, 지인, 영화 관계자들과 함께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이번 특별전에는 이병헌과 함께 출연한 ‘번지점프를 하다’(감독 김대승·2001)와 이범수와 함께한 ‘안녕! 유에프오’(감독 김진민·2004)를 상영하기로 했다. 이은주가 출연한 또 한 편의 영화 ‘연애소설’(감독 이한·2002)은 이은주 생전 지인과 팬클럽 회원을 초청해 상영한다.
‘번지점프를 하다’를 연출한 김대승 감독은 몇 해 전 한 좌담회에서 이은주를 “투명하고 백지처럼 깨끗한 배우였던 것 같아요"라고 기억했다.
김대승 감독의 말이 마음에 걸리는 건 우리가 이은주의 작품을 봐왔고, 이은주의 연기를 기억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그가 사망했을 당시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이해하기 위한 갖가지 추측을 쏟아냈던 건 그런 이유에서다. 우리는 이은주를 투명하고 깨끗해서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가 연기한 인물로 그를 기억하는 일이다. 이은주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그의 네 가지 얼굴을 적어봤다.
◇구지원… 드라마 ‘카이스트’(1999~2000)
“고등학교 2학년 때 난 나를 하나 만들었거든. 오랫동안 그런 내가 아주 편했어." “반경 1미터 짜리 원을 하나 그려놓고, 아무도 들어오지 마라. 나도 안 나갈 거니까. 그런 거?" “맞아 그럼 사람한테 신경 쓸 일이 없어지니까. 그런데 애들이 자꾸 나를 건드려. 그래서 화가 나."
드라마 ‘카이스트’에서 이은주가 맡은 구지원은 마음의 문을 철저하게 닫은 인물이다. 고등학교 시절,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집안은 풍비박산 나고, 알콜중독자가 된 아버지를 대신해 집안의 가장이 된 구지원은 주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철저히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살아가는 인물이다.
구지원은 이은주 특유의 차가운 인상과 맞물리면서 시너지를 냈다. 신인배우였던 이은주는 구지원을 통해 시청자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는 데 성공한다. 흥미로운 건 그가 주류 여배우의 성공 공식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대중에 이름을 알렸다는 것.
이은주는 청순가련형 배우도, 귀여운 외모의 배우도, 섹시한 매력의 배우도 아니었다. 기존의 문법으로는 분류하기가 어려웠다. 이은주가 연기한 구지원은 웃지 않았고, 차갑게 말을 내뱉었으며, 울지 않았다. 당시 무명배우였던 이은주는 구지원 그 자체로 보였다. 운이 좋게도 이 이미지는 이은주만이 낼 수 있는 어떤 분위기로 작용하며 그의 연기 인생에 날개를 달아줬다.
구지원은 카이스트 친구들의 따뜻한 마음을 알게 되면서 점점 마음의 문을 연다. 힘든 삶을 살던 구지원이 웃음을 되찾을 수 있었던 건 스스로 친 울타리를 걷을 수 있게 도와준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각하게 된다. 이은주에게는 민재(이민우)와 정태(김정현) 같은 친구가 있었다면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구지원의 시니컬한 대사가 자꾸 생각이 나는 건 그런 이유일지도 모른다.
◇수정… 영화 ‘오! 수정’(2000)
‘카이스트’를 마친 이은주는 파격적인 행보를 감행한다. 이제 막 배우로서 꽃을 피울 시기에 자신의 두 번째 영화로 홍상수의 작품을, 그것도 노출이 있는 영화를 택한 것이다. 당시 여배우에게 노출은 공들여 쌓은 이미지를 완전히 허물어버리고도 남는 것이었다. 하물며 이은주와 같은 이미지의 배우라면 타격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런 우려를 비웃듯 이은주는 영화 ‘오! 수정’에서 정보석, 문성근 두 연기파 배우에게 밀리지 않는 연기력을 보여주며, 그해 대종상영화제 신인여우상을 받는다. 이은주 나이 그때 겨우 스무살, 그는 스스로 여배우의 삶을 완전하게 열어젖힌다.
‘오! 수정’에서 재훈(정보석)과 영수(문성근), 그리고 수정(이은주)의 기억은 모두 엇갈린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을 함께 했음에도 그들은 완전히 다른 기억 속에 산다. 그리고 그들의 기억은 흑백의 화면에 담겨 죽어버린다.
모두가 이은주에 대한 다른 기억을, 각자의 추억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홍상수 감독의 생각은 맞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은주의 삶으로 한정할 때 홍 감독의 메시지는 결정적인 오류를 피할 수 없다. 많은 이들의 마음속에 이은주가 여전히 살아있기 때문이다. ‘카이스트’로, ‘오! 수정’으로, ‘번지점프를 하다’로, ‘불새’로 이은주는 기억된다. 그래서 홍상수는 부분적으로 틀렸다. 스무살의 이은주가 당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이 영화를 찍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그에 대한 기억은 생생한 컬러 화면에 담겨 살아있다.
“맞아요. 나 수정이에요."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이은주는 꽤 정확하게 기억되고 있다.
◇인태희…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2001)
인우(이병헌)는 기차역에서 태희(이은주)를 기다린다. 하지만 약속한 시간이 지나도록 태희는 오지 않는다. 열차 시간이 지나고, 역이 문을 닫을 시간이 되도록 태희는 오지 않는다. 태희는 그렇게 ‘갑자기’ 인우의 곁을 떠났다. 이은주도 태희처럼 떠났다.
김대승 감독의 ‘번지점프를 하다’는 이은주를 떠올릴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영화다. 인우가 쓴 우산 속으로 뛰어드는 태희, 새끼 손가락을 들고 컵을 쥔 태희, 왈츠를 추자는 태희, 숟가락은 왜 ‘ㄷ’ 받침이냐고 묻는 태희 등 ‘번지점프를 하다’ 속 이은주를 기억하는 방법은 제각각이다. 인우도 태희를 그렇게 기억했다. 그래서 현빈(여현수)이 태희와 같은 행동을 할 때마다 인우의 마음은 요동친다.
대중이 이은주를 ‘번지점프를 하다’로 기억하는 경우가 많은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다. 이은주는 ‘번지점프를 하다’에서 유독 아름다웠다. 그가 등장한 장면 하나하나가 감성을 미세하게 건드리는 것이었고, 그 감정의 파문은 쉽게 잊히지 않는 것이었다. 만약 이은주가 이 영화 한 편만 남겼다고 해도 이은주는 지금처럼 많은 이에게 기억됐을 것이다. 이은주가 태희였다면, 관객은 인우였다.
안타까운 말이지만, 어쩌면 이은주는 ‘번짐점프를 하다’에서 자기 자신을 연기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지은… 드라마 ‘불새’(2004)
가난한 학생 세훈(이서진)을 사랑하게 된 지은은 그에게 적극적으로 구애한다. 삶의 격차를 느낀 세훈은 지은을 멀리하려 하지만, 철딱서니 없는 여자 지은은 지치지 않는다. 결국 지은은 강수를 던진다. 세훈과 함께 탄 유람선에서 자신과 사귀어주지 않으면 강으로 뛰어내리겠다는 폭탄선언을 한 것. 지은은 뛰어내리고, 세훈과 사귀게 된다.
이은주는 대개 조금은 우울한 분위기를 가진 인물을 연기했다. 우울하지 않다면, 최소한 침착한 성격의 여자를 연기했다. 그 이미지를 완전히 깨버린 역할이 바로 드라마 ‘불새’의 이지은이었다.
많은 사람이 이은주의 죽음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건 아마도 이은주가 보여준 연기 행보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는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하는 배우였다. 이은주는 죽기 4개월 전까지도 전혀 해보지 않은 역할을 맡을 정도로 연기 의욕이 넘치는 배우였다.
2004년이 더 극적으로 느껴지는 건 영화 ‘안녕! 유에프오’와 ‘주홍글씨’, 드라마 ‘불새’에서의 연기가 매번 완전히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을 떠올릴 때마다 이은주가 보여준 그 의욕이 안타깝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는 더 많은 걸 이룰 수 있었을지도 모를 배우였다.
<손정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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