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7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 후보에 오른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보이후드’나 알레한드로 G 이냐리투 감독의 ‘버드맨’, 대미언 차젤레 감독의 ‘위플래시’ 웨스 앤더슨 감독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과 비교하면, 모튼 틸덤 감독의 ‘이미테이션 게임’은 평범해 보인다. 12년 동안 찍지도 않았고, 연출가의 야심이 크게 느껴지지도 않으며, 강렬한 엔딩이 있는 것도 아닐 뿐더러 감독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관을 볼 수 있는 영화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마도 ‘이미테이션 게임’은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여우조연상 등 주요 부문에서 오스카를 거머쥐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미테이션 게임’이 아카데미 시상식 장편 극영화 16개 부문 중 8개 부문 후보에 오른 건 우연이 아니다. 영화는 화려하지 않은 연출 방식을 택하고 있지만, 대신 진솔하게 관객에게 다가선다. 메시지가 강렬하지는 않지만 명확하다. 또 목표에 도달하는 과정이 정직하다. 편집과 촬영, 캐릭터 조형과 대사 작법, 결정적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에서 ‘이미테이션 게임’은 연출 교과서로 삼을 만하다. 허다한 한국영화들이 기본을 지키지 못해 실패하는 상황에서 ‘이미테이션 게임’은 하나의 모범 사례로 삼을 만하다.
연합군은 유럽 대륙을 향한 나치 독일의 침공을 힘겹게 방어해나가고 있지만, 독일군의 암호를 풀지 못해 점점 상황이 악화하는 걸 지켜만 봐야 한다. 1초에 아군 3명이 죽어 나가는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해독 불가능한 독일군의 암호 ‘에니그마’를 풀어내는 것. 결국 연합군은 ‘1,590억의 10억배’의 경우의 수를 풀기 위해 각 분야 천재들을 모은 암호 해독팀을 가동한다. 이 팀에 합류한 영국의 수학자 앨런 튜링(베네딕트 컴버배치)은 암호 해독에 열중하는 다른 팀원들과는 달리 알 수 없는 기계를 만드는 데 매달리고, 튜링을 향한 동료들의 원성은 갈수록 높아져 간다.
컴퓨터의 아버지로 불리는 앨런 튜링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미테이션 게임’은 매우 대중적인 화법의 실화 영화다. 실화를 영화로 만드는 가장 보편적이면서 이상적인 방식은 사건의 한복판에 선 인물이 일을 해결해가는 과정을 스크린에 담는 것과 동시에 한 명의 인간으로서 주인공의 내면을 조명하는 것이다. 모튼 틸덤 감독은 이런 종류의 영화를 만들 때 수행해내야 하는 ‘미션’들을 대개 좋은 점수로 완료한다. 영화는 궁금증을 만들어낼 줄 알고, 제때 풀어낼 줄도 안다. 미리 깔아둔 복선을 정확한 타이밍에 수거하기도 하고, 대중이 일반적으로 좋아할 만한 조금은 오글거리는 감정들(우정과 사랑 등)을 충분히 활용하기도 한다.
돋보이는 건 ‘암호 해독’이라는 매우 정적인 소재를 튜링의 독특한 성격을 활용해 긴장감있게 풀어내는 연출력이다. 튜링이 만든 기계가 에니그마를 해독하는 도구가 되리라는 것을 관객 모두가 아는 상황에서 틸덤 감독이 할 수 있는 건 튜링과 동료들의 갈등, 튜링과 MI6(영국 정보국)과의 갈등, 튜링과 해군과의 갈등을 차례로 그려 암호 해독의 순간을 더 극적으로 만드는 일이다. 에니그마를 파훼(破毁)하는 순간의 기쁨을 곧바로 동료가 관련한 딜레마로 치환해 또 다른 종류의 긴장감을 만들고, 그것을 튜링 개인의 삶으로 잇는 후반부 연출도 인상적이다.
뭐니뭐니해도 ‘이미테이션 게임’을 보는 가장 큰 즐거움은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연기를 지켜보는 일이다. 거만하고 집요하며 세심한 성격의 튜링을, 컴버배치는 그가 여타 다른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여줬던 특유의 몰입으로 생생하게 구현한다. 유별난 캐릭터를 유별나게 연기하는 컴버배치의 존재감은 자칫 밋밋하게 보일 수 있는 영화에 생기를 불어 넣는다. 그의 연기가 흥미로운 건 유사한 성격의 인물을 완전히 다른 인물로 보이게 하는 표현력이다. 말투와 걸음걸이, 미세한 손동작 등 연기 디테일로 유사 캐릭터로 비춰질 수 있는 ‘셜록’(컴버배치가 주연을 맡은 드라마 ‘셜록’의 주인공)과 튜링을 차별화한다.
<손정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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