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수립 초기유학생들로 타국서 6.25 바라보며 힘겨운 생활
초창기멤버 귀국과 한인회 힘 커지면서 70년에 맥 끊겨
해방전에는 1921년에 결성된 북미한인유학생회가 20년간 존속하면서 나라 잃고 해외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의 망국한을 달랬으나 해방이 되면서 희망을 안고 귀국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중 상당수는 신생정부의 탄생에 원동력이 되었다. 그가운데 학업을 못마쳤거나 미국 여성들과 결혼하여 가정을 꾸린 경우는 현지에 눌러앉아 미국시민이 되는 길을 걸었다. 그러나 그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한편 1948년 정부가 수립되면서 대한민국 여권을 가지고 미국으로 유학오는 케이스가 점차로 늘어났다. 정부수립 초기 유학생(1948년-50년) 중에는 박준규, 이동원, 백선기, 고광림, 서두수, 조동수, 김자경, 임길재, 윤기선, 현영학등이 있었다. 그들은 의지할데 없는 미국에서 625동란을 겪으며 어려운 고학생활을 견뎌낸 사람들이다. 이들 가운데 컬럼비아대, 뉴욕대 재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뉴욕지역 유학생회를 창립했다. 1955년 가을 컬럼비아대 얼홀에서 50여명의 유학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초대회장에 백선기(전 두원산업 사장, 작고)를 선출했다. 창립초기 2백명에 가까운 학생들이 각종 행사에 열성적으로 참석했다. 3.1절 기념식, 여름방학중 피크닉, 8.15 기념식등을 주관했고 연말 파티도 열었다. 이무렵 한국전 휴전이 성립되면서 더욱 많은 학생들이 미국 유학의 길에 올랐다. 김일평, 민병기, 김정원, 강원룡, 이한기, 노신영, 신병현, 김은우, 이정식, 김옥열, 정세영, 현봉학, 이범선, 김준섭, 차일석, 구두회, 홍순영 등이 합류했다.
이들은 이듬해 창설된 재미한인유학생 연합회 전국조직을 통해 모국에 도서보내기 운동을 벌였다. 휴전후 학업으로 돌아간 학생들에게 마땅히 읽을 책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뉴욕을 중심으로 조국에 대한 선물 캠페인을 전개했던 것. 각대학 유학생들의 호응으로 많은 양의 도서가 답지했다. 책은 무료였지만 운임이 모두 수취인으로 되어있어 운송료를 무는게 큰 부담이었다. 모처럼 호의를 베푼 학생들에게 반송할수도 없고 한국 공관등의 문을 두드렸으나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딱한 사정을 들은 교포들이 몇십달러씩 기부했고 뜻을 이해한 미국인들도 동참했다. 결국은 이들의 열성에 감동된 세계대학봉사회가 가치있는 사업임을 인정하고 운임 일체를 부담했다. 이를 통해 모집된 도서 1만2천권이 한국으로 수송됐다.
이동원(전 외무장관) 회장 시절에는 다소 무리였지만 타임즈 스퀘어 부근의 애스터 호텔 볼룸에서 넥타이, 정장차림의 댄스파티를 열어 학생들로 부터 인기를 모았다. 백선기, 이동원에 이어 정영엽( 전 이스트 미시건대 교수), 박무승(전 신라호켈 사장), 명태진(사업)등이 유학생회를 이끌었고 김일평(커네티컷대 명예교수) 회장 시절에는 뉴욕한인회가 창립되는데 큰 공헌을 했다. 준비위원회로 부터 시작해서 회칙 제정, 집행부 임원등으로 참여했다.
이때 학생 그룹으로 노재봉(전 국무총리), 노정현(전 연세대 교수), 김일평, 이범선, 이종익, 김승만, 어근등이 함께 참여했다. 이때까지 유학생들은 이승만 정부의 까다로운 유학생 정책으로 인해 고통을 겪었다. 학업을 마치면 지체하지 말고 곧바로 귀국해 조국에 공헌하라는 정책으로 학업도중 여권연장을 까다롭게 관리해 많은 학생들이 애를 먹었다. 이런 관행은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해소되기 시작했다. 본국정부가 해외유학생 정책을 완화시킨 계기가 있었다. 혁명정부가 1961년 국군의 날 행사에 재미유학생 대표들을 초청했다. 이때 참가한 대표들은 뉴욕의 백선기, 보스턴의 김경원, 워싱턴 오기창, LA 김종식, 샌프란시스토코 전명제등 5명이었다. 이들이 병역미필 학생들의 여권기간 연장등 7개항의 건의서를 정부에 제출, 해외유학생 정책에 일대 전환기를 맞았다는 것이다.
뉴욕 유학생회는 김일평의 후로 김진현, 계원창, 어근, 나필열, 최병철, 김영철, 강영국, 이영우, 신선희 등으로 이어졌다. 이무렵 학생회장 선거철에는 과열된 선거풍토가 눈에 띠었다. 경기고, 서울고 출신 인맥들의 경쟁이 심했던 시절, 그들만의 유대감은 좋았지만 남들이 소외받는 부정적인 경향이 있었다. 당시 하와이 이민2세로 뉴욕한인회장을 지낸 남병학의 이에대한 소회는
솔직했다. 전체적으로 한인들의 일류의식이 지나치게 강하고 특히 남자들은 출신학교 별로 그룹을 지어 분파행동을 하는 것이 부정적인 측면으로 비쳐졌다. 당시 서울고, 경기고 출신들로 양분되어 회장 선거를 놓고 지나친 경쟁을 벌였던 것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들간의 싸움 때문에 엉뚱하게 소수의 지지를 받은 제3세력이나 지방출신이 회장에 당선되는 경우도 있었다.
60년대 후반들어 학생회 활동이 차츰 약화되다가 70년 그 맥이 끊겼다. 쇠퇴 원인을 당사자들은 상대적으로 한인회가 비대해졌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했다. 1960년대만 해도 그 파워가 막강했던 유학생회 주축 멤버들이 보다 규모가 커진 한인회에 정열을 쏟았고 그들중 상당수가 귀국했기 때문이다. 이영우에 이어 1970년 신선희를 끝으로 뉴욕한인유학생회가 막을 내린 이후 한인학생들은 각대학별로 친목회를 조직, 나름대로 활동을 벌이고 있다.
■ 뉴욕 지식층들 토론그룹 ‘63학회’
30여 사회과학도 매달 시국토론
1958년 한국의 자유당 독재정권 부패상이 뉴스를 타고 전해질때 마다 분개한 뜻있는 학생들이 민우회라는 학생서클을 만들어 주1회 토론시간을 가졌다. 주로 세계정세, 유학생들의 문제, 한국의 독재정치등이 토론의 이슈가 되었다. 그러다가 1963년 광복절을 맞아 ‘8.15의 의의’라는 명제 아래 당시 뉴욕의 지식층을 망라한 토론 그룹이 형성됐다. 우리민족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물음이 63학회의 출발점이 되었다.
백선기를 비롯하여 노재봉, 김주봉, 김신행, 차인석, 김영근, 김일평, 김정원, 손창문, 어윤배, 김상중, 홍원택, 김경원, 유세희, 이형, 차대웅등 30여명의 재뉴욕 사회과학도들이 매달 한번씩 돌아가며 시국토론을 벌였다. 유학생활의 시름도 잊을겸, 때로는 학술논문의 구상을 발표해 토론도 하고 어
떤때는 주제 없이 만나 민족이라는 테두리 속에서 토론의 폭을 넓혀갔다. 이들중 상당수가 귀국해서 학계, 관계에 종사하거나 사회활동을 벌였다. 회원중 김일평, 김영근, 손창문등은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조중무<언론인,한국 국사편찬위원회 해외사료 조사위원>
■1961년 정부초청을 받은 유학생 대표들이 박정희 의장과 찍은 기념사진. 왼쪽부터 김종식, 양주은, 김경원, 한사람 건너 오기창, 가운데 박정희 의장, 백선기, 한사람 건너 전명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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