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치우(사진)씨는 남성복의 르네상스 시대라 할 수 있는 1930년대 우아하고 격조 있는 정통 영국 신사복의 명맥을 이어온 재단사이다.
48년째 신사복을 만들어온 그는 1960년 서울 반도호텔에서 한국 최초로 남성복 패션쇼를 열어 화제가 됐던 인물이다. 이어 1962년 조선호텔서 제2회 남성복 패션쇼를 열며, 남성들이 먹고살기 힘들어 옷맵시에 신경 쓸 겨를이 없던 당시 한국 사회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시대를 앞서갔던 그는 보다 넓은 세상을 보기 위해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하던 중 영국 복장가를 견학하며 영국 정통 신사복에 매료되게 된다.
석유파동으로 한국 경제가 위기에 처했던 1970년 미국으로 왔고 도미 직후 뉴욕의 피에르가르뎅에 입사, 9년간 어시스턴트 디자이너로 일했다. 그가 말도 잘 안통하는 낯설고 물선 곳에서 동양인으로서 피에르가르뎅에 입사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화려한 경력이 크게 작용했다.한국 최초의 남성복 패션쇼를 시도했고 1970년 스페인에서 열린 ‘세계 재단 박람회’에 출품한 작품이 좋은 반응을 얻은 것이 인정을 받았다고.
피에르가르뎅에서의 경험과 뛰어난 재단 실력을 바탕으로 1980년 맨하탄 80가에 자신의 양복점을 열었다. 이후 가게를 지금의 이스트 60가 30번지 건물로 이전, 지금까지 28년간 1930년대 스타일의 정통 신사복을 고수하며 유명인들과 명문가 출신의 엘리트들을 많은 고객으로 확보했다. 상류층이 즐겨보는 유명 잡지 ‘타운 앤 컨트리’에 크게 소개돼 유명해졌고 이어 시카고와 세인트루이스를 비롯 먼 곳에서 고객들이 그를 찾아왔다.
하버드와 예일대 등 미 동부 명문 아이비리그 출신의 월가 재력가들이 그의 옷을 좋아하고 단골 고객이 됐다. 박 재단사는 1930년대 영국 스타일의 정통 신사복을 재현하기 위해 단추에서부터 원단까지 영국에서 모두 직수입한다.그러나 어느 순간 ‘미국의 포로가 되었구나’라는 생각이 들며 그리운 고향생각에 은퇴해 귀국할 생각도 했지만 ‘당신이 떠나면 우리들의 옷은 누가 만들겠냐’며 만류하는 고객들 때문에 아직도 재단 일을 그만두지 못하고 있다.
언젠가는 한국에 돌아가기 위해 그는 요즘 신사복의 지침서라 할 수 있는 ‘남성, 스타일’(Man and Style, 가제)이란 제목의 책 출간을 위한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남성복의 격식과 스타일의 스탠다드를 이룩해 놓은 1930년대 복식 스타일에 대한 연구 자료와 ‘옷이 곧 인품‘이라는 자신의 신념을 담은 책이다.한국에 돌아가면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한국의 고궁을 거닐며 여유로움을 만끽하고 시골에 내려가 동네 해장국 맛도 보고 싶다”고 말했다.
<김진혜 기자> jhkim@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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