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 때 미국에 입양됐던 신호범 의원은 정계 은퇴 후 입양아 지원사업에 전념할 계획이다. 딸과 한 행사장에 참석, 손을 흔들고 있다.
임용근 의원은 리더십과 정열, 그리고 아이디어를 강조한다. 선거 유세중 유권자와 대화를 나누는 임 의원.
임용근 (오리건 주 하원의원)
신호범 (워싱턴 주 상원의원)
1992년은 한인 정치 도전사에서 가장 중요한 해였다. 이미 다뤘던 김창준 전 연방하원의원외에 오리건주에서 임용근씨(72·현 50지구 주하원의원·공화당)가 주상원 11지구 선거에서 승리했고, 신호범씨(72·현 21지구 주상원의원·민주당)는 워싱턴주 하원 21지구에서 당선됐다. 이들이 여전히 한인사회의 주목과 관심을 받는 것은 정계진출 이후 20년 가까이 굳게 자리를 지키며, 한인사회 정치력 신장의 중요한 버팀목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가난·입양 등 갖은 어려움 극복
뚝심과 용기로 백인유권자 사로잡아
임 의원과 신 의원은 공통분모가 많다.
우선 나란히 1992년 정계에 진출했다는 것과, 두 사람 모두 70대 임에도 불구하고 지역구 주민들의 전폭적인 지지속에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는 점, 주 상원과 하원을 오가며 풍부한 정치경험(두 사람 모두 5선)을 쌓았다는 것, 그리고 지역구가 모두 자신이 속한 당과는 반대 정서를 가지고 있다는 것 등이다. 또 두 사람 모두 한국에서 어려운 시절을 보내다 자수성가한 인물이란 점도 똑같다.
특히 정치에 발을 들여 놓은 이후 좌절과 위기, 고통의 시간이 있었지만 이를 모두 극복하고 일어선 정치인들이란 점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주의회에 진출하기 전 1990년 오리건주 주지사 선거에 출마하며 자신의 존재를 알렸던 임 의원은 주상원 재선에 성공한 뒤 임기제한에 걸려 잠시 쉬었다가 다시 상원에 진출했고, 2003년 선거에서는 과감히 주 하원의원 선거에 뛰어 들어 승리한 뒤, 지난해에는 공화당 열세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뚝심으로 완승을 일궈냈다.
임 의원은 상원과 하원을 거치며 무역분과위, 예산결산위, 교통분과위, 교육위, 소비자 보호위, 환경분과위 등 다양한 분야를 두루 섭렵, 의회내에서 다방면에 정통한 정치인으로 손꼽힌다. 특히 오리건 주의회에서 가장 연륜이 오래된 정치인이기도 한 그의 당을 초월한 열린 자세와 신념은 그의 재산이 되고 있다.
그는 오는 2010년 오리건주 주지사 선거출마를 공식 발표하고, 선거자금 모금을 위해 발빠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만약 그가 주지사에 오른다면 한인사회 최초라는 기록을 세우게 된다.
임 의원은 “지난 24년간 민주당이 주지사 자리를 독식해 왔고, 장기집권하면서 부작용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진단한 뒤 “2008년 하원 3선에 성공하고, 1차 선거자금 200만달러(총 선거비 700달러 이상 전망)가 모아지면 본격적인 유세에 돌입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신 의원 역시 21지구 주 하원의원을 거쳐(1994년 연방하원의원 도전 실패에 이어 96년 워싱턴주 부지사 선거에서는 불과 0.7%포인트 차이로 아깝게 낙선했다) 1998년 21지구 상원의원 선거에서 승리했고, 이후 2006년 11월 선거에서 승리하며 4선 고지에 올라섰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지난해 선거 당시 공화당은 후보를 내봤자 유권자들은 물론 기업체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신 의원을 이길 수 없다는 판단에 아예 후보조차 내지 않았다는 얘기가 공공연하게 돌기도 했다.
실제로 신 의원은 얼마전까지 주 상원 국제무역분과 위원장을 맡으며 항공기 제작업체 보잉사의 야심작 787기(일명 드리머) 해외 판매에 앞장서 시애틀을 중심으로 한 워싱턴주 기업들로부터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다. 그는 또 교육전문가도로 높은 명성을 얻고 있고, 아시안 비하단어인 ‘오리엔탈’이란 말을 금지시키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는 주 상원 부의장과 교육분과 부위원장, 경제분과 위원장을 지냈다.
두 사람의 의회 경력을 합하면 무려 10선이란 기록이 나온다. 영어도 부족했던 이민 1세가 주류 정치권 한복판에서 당당히 자신의 입지를 다질 수 있는 배경은 무엇일까. 임 의원은 “정치는 아이디어와 정열, 그리고 리더십으로 한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두 사람은 선거가 시작되면 약속이나 한 듯 똑같이 넓은 지역구를 걸어 다니며 유권자들을 만나 대화를 나눈다. 주민들의 불만을 청취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전달하는 것이다.
신 의원은 정치인의 자세에 대해 ‘봉사’라고 단언한다.
그는 “지역구 주민의 97%가 백인이고, 공화당 우세지역”이라며 “그러나 혹시 받지 못한 전화 또는 편지를 받게 되면 반드시 답장을 써 보내고 전화를 걸어 그들의 얘기를 듣는다”고 말했다. 그가 정치인으로 장수할 수 있는 비결인 셈이다.
한인들의 정치력 신장, 특히 정계 진출에 대해 두 사람은 똑같은 의견을 내놓았다.
우선 한인사회의 적극적인 지원과 관심이다.
임 의원은 “한인사회의 지지를 얻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주류사회에서 지지를 받아낼 수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또한 아직도 선거에 필요한 재원의 상당 부분이 한인사회에서 나올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각 지지그룹들로부터 선거자금을 기부받지만 여전히 목돈은 한인사회에서 나온다는 얘기다. 그만큼 한인사회의 경제력이 상당하다는 뜻이다.
임 의원과 신 의원은 그동안 자신들이 쌓아 온 힘을 바탕으로 후배들이 계속 정치의 문을 두드려 주길 바라고 있다.
임 의원은 “LPGA에서 박세리가 우승한 이후 한국 여자골퍼들이 잇달아 정상을 차지한 것처럼 우리를 발판 삼아 더 많은 한인 정치인이 나와야 하고, 또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하면서 “1세들도 본국 정치보다 우리 권익이 걸린 미국 정치에 보다 많은 관심과 투자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임용근 의원
경기도 여주 출신. 고교 3학년 때 등록금이 없어 미군부대에서 하우스 보이로 일하며 학비를 마련했다. 이 때문이 졸업이 1년 늦어졌다. 1966년 오리건주로 유학온 그는 포틀랜드 주립대 정치학과, 웨스 신학대를 졸업했으며, 이후 정원사, 은행직원, 청소업, 부동산업, 선박 관리업, 비타민 제조공장 운영 등 온갖 일을 하며 부를 축적했다. 그리고 50대에 접어들면서 사회활동에 관심을 두기 시작해 결국 정치인으로 성공했다.
신호범 의원
경기도 파주 출신. 말 그대로 찢어지게 가난해 어린 나이에 가출, 거지나 다름없는 시기를 보냈다. 특히 배가 고파 죽음을 택한 친구에 대한 기억은 그의 뇌리에 깊이 남아있다. 한국전쟁은 그에게 전화위복의 기회였다. 미군부대 하우스 보이로 생활하다 필립 대위를 만나 18세에 미국으로 입양됐다. 그리고 공부에 매달려 워싱턴 주립대에서 동양역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교수로 활동하다 정계에 입문했다. 앞으로 정계 은퇴 뒤에는 입양아 지원활동에 나설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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