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때로 과거에 환하게 불이 켜질 때가 있다/ 처음엔 어두운 터널 끝에서 차차 밝아오는 불빛이다가/ 터널을 통과하는 순간 갑자기 확 밝아오는 불빛처럼/ 과거에 환하게 불이 켜질 때가 있다/ 정호승의 시 <불빛>의 일부. 그렇다. 살다 보면 가끔 내 기억의 어느 지점에 환하게 불이 켜질 때가 있다. 인생은 이미 시작되었으나 기억이 미치지 못하는 부분은 아직 내가 주인공이 아니었다. 무대에 불이 켜져야 배우의 연기를 볼 수 있듯이, 나의 인생 무대도 기억의 불빛이 비치는 지점부터 비로소 시작된다.
내 삶에도 많은 사람이 스쳐 지나갔고 누군가는 깊은 흔적을 남겼으며, 또 누군가는 지금도 함께 걷고 있다. 정녕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였건만, 시대와 사건과 사람은 때로 나를 나답게 살지 못하게 했다. 원치 않는 뙤약볕 아래 땀을 흘리기도 했고 차가운 계곡물에 발을 담그거나 거친 파도에 휩쓸려 허우적거리기도 했다. 그런데도 분명한 것은 세상과 사건과 사람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갔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심리학자 에릭 에릭슨(Erik Erikson)은 노년기를 ‘노쇠와 죽음을 앞두고 회상을 통해 자신의 삶을 점검하는 시기’라고 했다. 질풍노도의 20대와 안개 속을 걷는 듯한 혼돈의 30대, 어깨를 짓누르는 책임감으로 고단했던 4, 50대를 모두 흘려보내고. 이제 더 이상 뭔가를 하지 않아도 되는 편안한 시간에, 지나온 삶을 진중하게 되돌아보며 아름다운 마무리를 하는 것은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다.
올해 들어 수필 공부를 하는 그룹에서 ‘자전 수필 쓰기’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각자의 기억이 시작되는 지점부터 글을 풀어내자고 하니 약속이라도 한 듯 초등학교 시절의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같은 시대를 관통해 왔음에도 각자가 그려내는 무늬는 너무 달라서 신기해하기도 하고 웃기도 한다.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은 마치 산 길을 걸어가는 것과 같아서 멀리서 보면 그저 그렇게 두루뭉술한 한평생이지만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색깔과 촉감이 너무나 다양하고 다채롭다. 먼 데 능선은 울창한 숲인데 큰 나무 아래에 갖가지 꽃, 하늘을 날아가는 새와 땅을 헤집고 다니는 벌레. 따사로운 햇볕과 어두운 그늘, 산들바람과 쏟아지는 비가 있는 것처럼. 거기에 더하여 우리는 고국을 떠나온 디아스포라로서 한 생(生)을 살아왔기에 더욱 풍성하다. 자전 수필은 한마디로 ‘자기 고백’이다. 자신만의 경험과 의식을 글로 드러내는 이 작업은 단순히 기억으로 경험 세계를 회상하며 기록하는 것이 아니다. 본인의 현재 관점에서 과거 경험을 재구성하고 해석하는 창조의 과정이다. 현재의 자아가 과거의 어떤 경험 속 자아에 다가가 몸과 마음에 각인된 기억을 어루만지며 울고 웃는 일이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과거와 화해하고 현재의 나를 치유한다. 내가 나를 용서하고 껴안을 때야 비로소 우리는 자손에게 그 이야기를 전설처럼 들려줄 수가 있다.
그것이야말로 다음 세대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 유산이 될 것이다. 일반적인 자서전이 기술하는 역사의 대상은 영웅이거나 특별한 위인이지만 우리가 쓰는 자전 수필은 평범한 사람이 살아온 보통의 삶이다. 수필 공부 그룹의 글은 지금 고등학교 시절까지 나아갔다. 이 프로젝트가 마무리될 즈음에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각자의 삶 속에서 영웅이 되어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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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민희 수필 평론,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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