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복 재단사 35년의 경력을 지닌 김양득(사진) 모모 양복점 사장은 특수 체형에 맞는 맞춤복 양복으로 전체 고객의 80%가 타민족일 만큼 타민족 공략에 성공했다.
어깨가 유난히 좁거나 가슴이 크고 거구이거나 배가 많이 나오는 등 기성복이 잘 맞지 않는 특수 체형의 사람들이 그의 양복점을 찾는다.형지조작법에 의거해 패턴을 제작, 이들에게 ‘내 몸에 꼭 맞는 양복’을 만들어준다. 그의 재단 실력이 입소문을 통해 알려지며 유명 인사나 옷맵시를 중시 여기는 사람들도 그에게서 양복을 맞추고 있다.그의 고객들 중에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비롯 미식축구선수 퍼거슨과 변호사 등 VIP 고객
들이 많다.
재단 일에 뛰어든 것은 1973년. 고향인 경남 거제를 떠나 고교 졸업 후 부산으로 온 그는 대학입학 시험에서 떨어져 재수를 하다 부산의 유명 양복점 사장의 권유로 재단 일을 배우게 됐다. 부산 노라노 양재학원에서 1년 과정의 재단·재봉 수업을 6개월만에 마친 후 양복점 공장에 취직했다.3년간 공장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기술을 배웠다. 재단을 뜨는 테이블을 침대 삼아 새우잠을 자며 최고의 재단사가 되기 위해 이를 악물고 고생을 참아냈다. 양복점에서 일하다 군입대, 제대후 다시 재단 일을 시작한 그는 1980년 국가 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83년 고향 거제로 내려가 양복점을 운영하며 전국 대회 최우수상과 창작 발표회 우수상 등 여러 상을 휩쓸며 재단사로 실력을 인정받게 된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그는 양복점를 운영하면서 여성 의류 쪽으로도 눈을 돌려, 통영과 거제에 여성 의류 조이너스 대리점 오픈을 시작으로 한때 중저가 여성 의류 브랜드 매장을 8개나 소유하고 94년에는 중국으로 진출, 사업을 확장해 나갔다.
그러나 승승장구하던 사업이 IMF 사태로 어려움을 겪었다.중국 대련 중심가에 ‘득미‘ 양복점을 차리고 현지에 공장을 건설, 옷을 주문받아 한국으로 수출하는 의류사업까지 손을 댔지만 IMF 사태가 터져 결국 사업을 접고 1999년 미국으로 왔다. 도미 후 세탁소에서 다림질 하고 의류점에서 옷 수선을 하며 모은 돈으로 2001년 노던블러바드 147가 선상에 있는 모모 양복점을 인수했다.양복점을 인수 후, 고객 유치를 위해선 주먹구구식의 운영이 아닌 혁신이 필요하다고 판단, ‘특수 체형에 맞는 맞춤복 양복’으로 고객 유치에 나섰다. 이를 위해 체형에 맞는 50가지 샘플 양복을 제작, 이민생활에 바쁜 한인들의 시간을 절약해줘 타주에서도 많은 한인들이 양복을 맞추러 왔다.
장사가 잘되어 2003년 뉴저지 리지필드 한아름내 모모 양복점 뉴저지점을 열었다.앞으로 비싸다는 생각에 맞춤복 입기를 꺼려하는 한인들을 위해 중저가 맞춤복 제작에 역점을 두고 내년에는 미국인들을 겨냥, 맨하탄에 양복점을 오픈해 젊은층 고객 확보에 나설 계획이다. 하은교회 장로인 그는 부인 김덕선씨와의 사이에 3남 1녀를 두었다.
<김진혜 기자> jhkim@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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