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배 분류 노동을 두고 인간과 안드로이드가 붙었다. 미국 피규어AI사의 ‘피규어03’은 어설픈 손놀림으로 물건을 놓치고 실수하면서 뒤처졌다. 인간의 승리였다.
그러나 10시간의 승부가 끝나고 인간이 팔의 통증을 호소하며 자리를 떠난 후에도 로봇은 작업을 계속했다. 회사 측은 테스트 차원에서 로봇이 고장날 때까지 일을 시켜볼 계획이다. 14일 시작된 피규어03의 노동은 지금 이 순간에도 유튜브를 통해 생중계되고 있다.
알파고가 딱 10년 전 이세돌을 꺾으며 인공지능(AI)은 인간의 지적 영역에 발을 들였다. “AI가 인간 바둑을 이겼는데, 그래서?”라는 의문은 그 사이 등장한 생성형 AI 모델들의 활약을 보며 감탄으로 이어졌다. 이(것)들은 화이트칼라 일자리부터 잠식하기 시작했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AI의 막대한 데이터 처리와 추론 능력은 고임금 고숙련 전문직마저 압도한다. 알파폴드는 수십 명의 박사가 평생 매달려야 할 단백질 구조 예측을 단 몇 시간 만에 해결한다.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길수록 당신의 일자리는 대체될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 그래서 나왔다.
오히려 인간의 영역일 줄 알았던 육체노동도 이제 대체되기 시작했다. 피규어03이나 보스턴다이내믹스의 아틀라스 같은 안드로이드들은 아직 어설프다. 실수하고, 헤매고, 뒤뚱거리고, 넘어진다. 그러나 앞으로 기술 발전에 가속도가 붙을 것이다. “사람들은 항상 2년 안에 일어날 변화는 과대평가하고 10년 안에 일어날 변화는 과소평가한다”는 빌 게이츠의 통찰을 떠올리면 불가침의 인간 영역은 생각보다 빠르게 줄어들 것이 자명하다.
안드로이드는 어설프지만 섬뜩하다. 먹지도, 자지도, 쉬지도 않는다. 게다가 싸다. 아틀라스의 가격은 미국 생산직 노동자 2년치 연봉(약 2억 원)보다 낮게 책정될 것으로 예상된다. 피규어03의 가격은 약 2만 달러(3000만 원) 선이다. 일론 머스크도 안드로이드 ‘옵티머스’ 가격을 2만 달러까지 낮추겠다고 공언했다.
영화 속에서 보던 다크 팩토리의 풍경은 현실이 되고 있다. 현대차는 미국 자동차 공장에 내후년까지 2만 5000대를 생산 라인에 배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미 피규어02는 BMW 미국 공장에서 업무 경력을 쌓았고 테슬라 기가팩토리에서는 옵티머스가 ‘견습생’으로 투입됐다.
기계는 허드렛일을 덜어주고 인간은 고부가가치의 일을 맡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순진하다. 자동화를 위한 기업의 투자는 결국 비용 절감이 가장 큰 목적이다. 비싼 노동일수록 AI를 통한 대체 압력은 커진다. 노벨상 수상 경제학자 다론 아제모을루는 “임금이 높은 노동자의 업무일수록 기업들은 자동화하려는 유인이 크다”고 지적했다. 고임금을 받는 ‘애매한’ 고숙련 노동자의 가치는 떨어지고 AI를 자유자재로 부리며 회사 전체의 생산성을 극대화하는 극소수 핵심 인력의 가치만 더 커질 가능성이 높다.
인간 노동의 가치에 대한 거대한 전환이 시작된 시대, 한편에서는 또 다른 생경한 풍경이 펼쳐졌다. 삼성전자 노동자들이 파업을 무기로 인당 최대 6억 원(연봉 1억 원 기준)의 성과급을 쟁취했다. 성과급이라는 말이 무색하게도 적자 사업부 직원들까지 억대의 돈을 챙겨갈 것으로 전망된다. ‘회사가 돈 벌었으니 당장 목돈을 내놓으라’는 식의 요구 앞에서 국가 경제의 중추인 반도체 생산 차질 우려에 휩싸인 회사와 정부 모두 사실상 물러선 모양새다. 대한민국 대표 기업에서 회사 이익의 N%를 직원이 나눠 갖는 식의 보상 체계가 자리잡기 시작하면 그 파장은 결코 작지 않을 것이다. 경쟁사와 협력 업체, 다른 대기업 노조들까지 연쇄적으로 자극할 가능성이 크다. 만인투쟁의 시대를 여는 신호탄이 될지 모른다는 우려마저 나온다.
경직된 노동 규제에 묶인 기업들이 언제까지 ‘애매한’ 고숙련 직원들에게 거액의 성과급을 쏟아부을 수 있을까. 아니, 그런 구조로 글로벌 경쟁력을 유지하며 살아남을 수 있을까. 기업들은 생산성을 극대화하는 핵심 인력은 진짜 성과에 따른 보상으로 지키되 그 외 인력은 AI로 대체하려는 욕구가 커질 것이다.
더 우려스러운 것은 그 다음이다. 노조 눈치보느라 AI 도입 속도가 늦는 한국이 아니라 미국이나 중국처럼 AI와 자동화를 공격적으로 밀어붙이는 국가들로 일자리가 이동하는 시대가 올 수도 있다. 과거 기업들이 저숙련·저임금을 찾아 동남아로 생산기지를 옮겼다. ‘고숙련·저비용·무쟁의’의 AI 노동력을 향해 자본이 움직이는 시대가 올 가능성을, 우리가 과소평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
이혜진 서울경제 문화부 선임 기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