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4월 29일, 로스앤젤레스의 하늘을 뒤덮은 검은 연기는 미주 한인 사회의 근간을 뒤흔들었다. 올해로 34주년을 맞는 LA 폭동은 이제 아득한 기억의 저편으로 밀려난 듯하지만, 그날의 불길은 한인 이민사에 지울 수 없는 이정표를 남겼다.
그것은 단순히 재산의 손실이 아니라, '성실함이 곧 안전을 보장한다'는 소박한 믿음의 파산이었다.
폭동 이전까지 한인들의 아메리칸 드림은 명료했다. 언어의 장벽을 몸으로 때우며 가게를 열고, 좋은 집과 차를 사고, 자녀를 명문대에 보내는 '개인적 성공'이 전부였다. 그러나 폭동은 잔인한 진실을 일깨워주었다.
공권력이 외면하고 정치적 목소리가 부재한 공동체는 위기 앞에서 가장 먼저 버려지는 소모품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열심히 사는 것"과 "존중받는 것"은 결코 같은 선상에 있지 않았다. 한인들은 불타는 가게 앞에서 비로소 묻기 시작했다. "우리는 왜 보호받지 못했는가?"
이러한 뼈아픈 경험은 우리만의 것이 아니다. 미국 역사 속 소수계 커뮤니티들은 늘 박해와 차별의 순간을 '시민권적 도약'의 계기로 삼았다.
일본계 미국인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강제 수용이라는 국가적 폭력을 겪었으나, 수십 년간 끈질기게 진상 규명과 배상을 요구했다. 그 결과 1988년 레이건 행정부의 공식 사과를 이끌어냈으며, 이는 단순한 금전적 보상을 넘어 소수계의 시민권을 국가가 인정한 역사적 승리였다.
중국계 미국인은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 이후 재건 과정에서 의도적인 배제와 차별을 겪었으나, 조직적으로 대응해 상권과 거주권을 지켜내며 차이나타운을 생존의 거점으로 확립했다.
털사 학살(Tulsa Massacre)을 겪은 흑인 공동체 역시 비극을 침묵 속에 묻어두지 않고, 세대를 이어 기억을 복원하며 제도적 보상과 정의를 요구해오고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명확하다. 피해를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을 '구조적 차별'의 문제로 치환하여 법과 제도를 바꾸는 동력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LA 폭동 이후 30여 년간 한인 사회는 괄목할 만한 변화를 일궈냈다. 유권자 등록과 투표 참여를 통해 정치력의 기초를 다졌고, 풀뿌리 로비 활동으로 우리 목소리를 의회와 행정부에 전달하는 법을 배웠다.
이제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위기의 순간 공동체를 실질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법적·제도적 인프라가 필요하다. 시민참여와 법률적 방어망의 강화만이 또다른 폭동의 피해를 막을 수 있다.
그래서 시민참여센터는 2017년부터 법률가들을 조직해 대책위를 운영해왔다. 권리는 주장하여야 쟁취할 수 있으며, 그 주장은 전문적이고 조직적인 뒷받침이 있을 때 비로소 힘을 얻기 때문이다.
4.29 LA 폭동은 한인 사회에 깊은 흉터를 남겼지만, 동시에 강력한 시민의식을 잉태했다. 우리는 더 이상 묵묵히 일만 하는 '보이지 않는 이민자'가 아니다.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연대하고, 타 커뮤니티와 손잡으며, 주권을 행사하는 당당한 구성원으로 성장하게 하였다.
폭동 34주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잿더미의 슬픔이 아니다. 다시는 그런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스스로를 지킬 힘을 기르는 결기다.
정치적 역량 강화와 법률적 방어망 구축, 그리고 타 공동체와의 연대는 34년 전 희생된 이들이 우리에게 남긴 숙제이자, 우리 아이들에게 물려줄 안전한 미래의 설계도다.
역사는 침묵하는 자를 보호하지 않으며, 오직 조직된 공동체만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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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찬/시민참여센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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