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즘여행 - 취리히·샤프하우젠·슈타인암라인
기차에는 낭만이 있다. 4시간 버스·차량 이동을 앞두고 있다면 문밖을 나서기 전부터 피곤하고, 4시간 비행은 ‘어떤 영화를 보면 도착할까’라는 생각부터 떠오른다. 그렇지만 4시간 기차여행은 다르게 느껴진다. 창밖을 스치는 멋진 풍경, 일행과 도란도란 나누는 이야기, 조금 식어도 맛있는 주전부리가 생각난다. 누구든 기차여행에 대한 좋은 추억 하나쯤은 갖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기차여행의 종점이자 정점에 있는 곳이 스위스다. 세계에서 가장 정확한 철도망은, 유럽 여행은 어렵다는 생각을 지워준다. 장엄한 알프스의 설산과 장대한 포도밭 사이를 샅샅이 누비기에 답답하기는커녕 여정 내내 눈이 즐거운 점은 덤. 스위스 기차여행을 다녀온 이들은 하나같이 “하루 종일 창밖만 내다봐도 질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덕분에 국내 여행하듯 거점 도시에 잡은 숙소를 옮기지 않고 주위 도시를 둘러보는 여행도 가능하다. 현지 관광업계에서는 이를 ‘데이 디스커버리(Day Discoveries)’라고 부른다. 일종의 ‘당일치기’ 여행인 셈이다.
취리히(동부 독일어 문화권)와 로잔(서부 프랑스어 문화권)에 거점을 잡고 스위스식 당일치기 기차여행을 떠나봤다. 취리히 편과 로잔 편을 2주에 나눠 싣는다.
■ 라인강 따라 찾아가는 유럽 최대 폭포와 중세 도시
오랜 세월 중립국 지위를 유지한 스위스는 유럽 전역을 휩쓴 세계대전의 포화를 피해갔다. 덕분에 수백 년 역사를 자랑하는 고성과 고택이 도시·마을 단위로 보존됐다. 독일 영토를 향해 불쑥 튀어나와 있는 모양의 샤프하우젠(Schaffhausen)주의 주도(州都) 샤프하우젠과 슈타인암라인(Stein am Rhein)은 동부 스위스를 대표하는 중세도시다. 샤프하우젠 구시가지는 유럽 최대의 폭포(수량 기준)인 라인폭포로부터 불과 3㎞ 떨어져 있다. 한 동선에 라인폭포의 절경과 유럽 중세도시의 미(美)를 담을 수 있다니 지나칠 수 없다.
여행의 첫 목적지인 라인폭포는 취리히역으로부터 기차로 1시간도 안 되는 거리에 있다. 환승 없이 50분 만에 도착한다. 기차에서 내려 라인폭포와 라인강 일대의 경치를 감상하며 10분 걸으면 뵈르트(Worth) 성에 도착한다. 이곳 선착장에서는 폭포 바로 앞까지 운항하는 유람선과 강 건너편 라인폭포 옆 라우펜(Laufen) 성을 왕복하는 배를 이용할 수 있다.
이 선착장에서 ‘바위 체험(록 익스피리언스)’ 유람선에 탑승하면 150m 넓이의 라인폭포를 가르는 바위에 직접 오를 수 있다. 바위에 오르는 길은 마치 폭포를 오르는 것 같다. 초당 60만 리터의 물이 쏟아지는 우레 같은 굉음 속에 둘러싸여 하늘을 향해 나아간다. 정상에 다다르면 라인강 한복판에 우뚝 서게 된다. 폭포 뒤로 1,2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라우펜 성과 강을 건너는 기차가 보여 참으로 ‘스위스’다운 풍경이라 할 수 있다. 점심쯤에는 많은 인파가 몰리니 이른 시간에 방문하기를 권한다. 한적한 시간대에 유람선을 탑승할 수 있다면 홀로 라인폭포를 다 가진 것만 같은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
라인폭포 관람을 마치고 다시 기차에 몸을 실으면 10분도 안 돼 샤프하우젠 시내에 진입할 수 있다. 중세부터 이어진 경관이 가장 잘 보존된 구시가지 일대는 차량 통행이 전면 금지돼 있다.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차량의 위협과 경적에 정신을 빼앗기지 않고 온전히 도시에 융화될 수 있다. 거리는 주차된 차량 대신 햇살을 전채 삼아 느긋한 점심을 즐기는 시민들로 가득하다.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의 연혁은 무려 11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만성회랑(萬聖回廊·Klosteranlage zu Allerheiligen)으로 유명한 샤프하우젠 대성당은 1049년에 준공됐다. 시내 곳곳에는 과거 스위스 사회의 주축이었던 길드(직업조합)하우스가 즐비하다. 화려한 장식의 퇴창(退窓, 돌출된 창문)은 당시 유력 가문과 조합의 위세를 과시하는 방법이었는데, 이곳에만 171개가 남아있다. 샤프하우젠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물은 당연히 ‘기사의 집(Haus zum Ritter)’. 1570년 화가 토비아스 슈타이머가 건물 외벽에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와 시민의 덕목을 주제로 한 벽화를 그렸기 때문이다. 원본 벽화는 미술관으로 탈바꿈한 수도원 내부에서 보존하고 있지만 정교하게 재현된 벽화가 당시의 화려함을 그대로 선보이고 있다.
샤프하우젠의 미관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볼 때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데, 무노트(Munot) 요새가 전망대로 제격이다. 마을에서 가장 높은 언덕 위에 축조된 원형 요새다. 듬직해 보이는 외형과 달리 축조 시점에 이미 화약 병기의 파괴력이 성벽의 방호력을 넘어선 시점이라 요새에서 격전이 벌어진 적은 없었다고 한다. 덕분에 무너진 곳 하나 없이 온전히 보존돼 있다. 육중한 아치 구조가 인상적인 요새 내부를 지나 원형 계단을 오르면 상부 공간에 오를 수 있다. 요새 위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면 뾰족하게 솟은 경사 지붕이 겹겹이 늘어선 중세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한눈에 볼 수 있다.
■ 황제가 옮긴 수도원, 1000년 마을을 세우다
샤프하우젠에서 20여 분을 더 가면 슈타인암라인에 도착한다. 샤프하우젠보다도 더 ‘중세스러운’ 마을이다. 샤프하우젠이 현대적으로 정비된 중세 대도시 같다면 슈타인암라인은 수백 년 전으로 시간여행을 온 듯하다. 스위스는 물론 유럽 전역을 통틀어도 훌륭히 보존된 중세 도시로 꼽힌다. 매년 우수한 역사 보존 성과를 올린 지자체 한 곳을 선정해 수여하는 바커(Wakker)상 초대 수상 지역이기도 하다.
마을 중앙의 시청광장 일대가 특별히 압권이다. 시청 건물과 광장을 둘러싼 거의 모든 건물이 형형색색의 벽화로 장식돼 있다. 퇴창의 수는 샤프하우젠에 비해 적을지언정 외형의 화려함과 세월의 무게감은 결코 뒤처지지 않는다. 판타지 영화나 중세 사극 드라마 세트장 한복판에 서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지만, 엄연히 주민들이 거주하고 생업을 이어가는 실제 마을이다.
지금의 슈타인암라인을 있게 한 성조지수도원(St. George’s Abbey)은 필히 방문해야 하는 명소다. 현재는 박물관으로 운영돼 입장료(7스위스프랑·약 1만3,000원)를 지불하고 모든 시설을 둘러볼 수 있다. 스위스 전역의 대중교통과 박물관을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는 스위스 트래블 패스 제휴 박물관 중 하나라 패스 이용자는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원래 타지에 설립됐지만 1007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헨리 2세가 직접 이곳으로 수도원을 이전시켰다. 작은 어촌이지만 교통 요충지였던 슈타인암라인에 대한 제국의 통치력을 강화하기 위함이었다고. 황제의 관심을 받아 성 조지 수도원을 중심으로 교역도시로 성장했고, 지금의 모습에 이르렀다. 수도원도 1,000년이 넘는 세월을 존속한 만큼 많은 변화를 거쳤다. 14세기에서 16세기 사이 성행한 고딕과 르네상스 건축 양식이 지배적으로 남았지만 곳곳에서 초기 로마네스크 양식도 관찰할 수 있다. 다소 투박한 공용공간에 비해 수도원장 집무·거주실은 섬세한 조각과 벽화로 꾸며져 있다. 특히 내부 채광과 벽화가 함께 자아내는 신비로운 분위기는 실로 경이롭다.
■여유와 문화의 도시 취리히
하루를 투자해 라인강 일대 중세도시 여행을 마쳤다면 다음 날은 취리히 시내를 둘러보기를 권한다. 구시가지 일대에는 시대를 풍미한 길드하우스를 개조한 음식점, 카페 등이 즐비하다. 하나같이 개성 있는 공간 경험을 제공하는 곳들이니 이용해 봄직하다. 주민들처럼 취리히 호수변의 녹지에서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다. 호수 너머로 알프스 산맥의 설산이 시원하게 보이니 이보다 좋은 경치도 없다. 린덴호프 언덕은 시내의 전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뷰포인트라 주민, 관광객 할 것 없이 많이 찾는다.
취리히 구시가지를 살짝 벗어나면 스위스 최대 미술관 쿤스트하우스 취리히가 자리한다. 도로를 사이에 두고 카를 모저가 설계한 본관(1910·모저관)과 데이비드 치퍼필드가 설계한 신관(2020·치퍼필드관)이 마주 보고 있다. 관람객은 건물을 나서지 않고 지하통로로 두 전시관을 오갈 수 있다. 치퍼필드관은 쾌적하고 넓은 전시관에 근현대 미술품을 주로 전시하고 모저관은 웅장하고 고전적인 전시관에 중세 및 르네상스 미술품을 주로 전시한다. 두 전시관의 공간적 특성에 맞는 전시품을 가져다 두어 관람객이 더 몰입할 수 있도록 한다. 빈센트 반 고흐, 클로드 모네, 에드가 드가 등 세계적 예술가들의 전시품이 한자리에 모였다. 올해 2월부터 8월까지 신관 특별 전시관에선 케리 제임스 마샬 특별전이 열린다.
글씨체 ‘헬베티카’로 대표되는 스위스 디자인의 정수를 만나고 싶다면 디자인 박물관을 찾아보자. 시내 3곳에 본관, 토니아레알관, 파빌리온 르 코르뷔지에 전시관을 두고 있다. 파빌리온 르 코르뷔지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 작품’ 중 하나다. 취리히 예술대학에 위치한 토니아레알관은 개방형 수장고를 운영한다. 수장고 일부를 일반에게 공개한 실험적인 시도다. 일반 전시와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 속에서 소장품을 감상할 수 있어 추천한다. 관람객의 동선에 따라 수장고의 조명이 자동으로 작동해 다른 관람객이 없다면 으스스한 느낌마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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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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