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는 처칠 수상, 찰리 채플린, 원조 ‘뚱뚱이와 홀쭉이’ 로럴과 하디에서 디즈니 만화영화 ‘토이 스토리’의 미스터 포테이토까지. 주식 중개인을 정체성 삼은 런던 진 ‘브로커’, 오래 된 007 시리즈 ‘골드핑거’에 악당 두목의 심복으로 나오는 오드잡….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힌트는 마지막에 이름 올린 오드잡(Oddjob), 한국인이라는 설정에 보디가드 겸 운전사 겸 캐디 겸 이 일 저 일 가리지 않고 다 해서 붙은 이름인가 본데, 그 오드잡이 날리는 살인무기, 대리석상의 목도 댕강 날려버리는 바로 그 모자에 있다.
납작하니 둥근 뚜껑에 테두리가 좁고 둥근 챙, 뻣뻣하니 밟아도 쭈그러질 것 같지 않은 중산모, 볼러 햇(Bowler hat)을 쓴 모습으로 우리가 기억하는 사람들이다.
이 남성 패션의 대열에 합류한 여인들이 있다. 남미 볼리비아의 여성들이다. 라마 털로 짠 화려한 색상의 쇼울에 검정색의 겹겹치마, 그 전통복식에 정점을 찍는 것이 바로 볼러 햇인 것이다.
영국의 도시 노동자에서 공무원과 은행원, 미국에 와서는 말타는 카우보이들이 쓰던, 우리가 흔히 아는 카우보이 모자보다 더 사랑받던 볼러가 생뚱맞게도 안데스 높은 산악지대에서 여성패션으로 꽃을 피우다니. 그 사연이 궁금해진 것은 폴스처치 50번 도로상의 라틴마켓에서 일을 하면서다.
볼리비아산 말린 감자, 곡물, 콩, 복숭아, 고추 등을 납품하는 업체의 포장에서 검고 둥근 모자를 쓴 아가씨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산타 카탈리나’라는 브랜드다. 이십 년 전 당시에는 가내 수공업 수준으로 외관상 조악하기 이를 데 없었다. 허술하고 크기가 저마다 다른 종이상자에 겹겹이 테이프를 둘러, 주문에서 배달, 진열까지 사장이 혼자 하던 일인 사업체. 얼마나 가나 싶었는데 지난 달 루트 1에 새로 오픈한 수퍼마켓에 가서 봤더니 포장이며 칼라풀한 인쇄까지 훨씬 세련된 모습이어서 반가웠다.
이곳 북버지니아는 볼리비아 이민자들의 메카다. 한때 전체 미국 볼리비아 이민자의 40퍼센트 가까이가 몰려 살았는데 알링턴 카운티에서 50번, 29번 도로를 따라 점점 서쪽으로 퍼져갔다. 산타 카탈리나 아가씨도 그렇게 자리를 잡았을 것이다.
아차, 모자 얘기 하려던 거였지.
볼러는 영국 모자업자 형제의 이름이다. 수렵지 관리인들이 쓰게 튼튼한 모자를 만들어달라는 주문을 받아 1849년에 선을 보였다. 기존의 탑햇, 링컨 대통령과 엉클샘의 그 높다란 모자를 쓰고 말을 타다보면 나뭇가지에 모자가 걸리는 불편을 종종 겪기 때문이다.
일하는 사람들의 실용적인 목적으로 태어난 볼러는 20세기에 들어서며 도시의 화이트 칼라들에게 번졌다. 검은 모자에 검정우산 차림의 런던 차도남. 지금은 보기 어렵지만 그 인기가 1970년대까지 이어졌다.
안데스 지역에 볼러가 들어온 배경은 구리를 비롯한 광산 개척 붐이 일면서다. 19세기 후반 광물 운송을 위해 철도가 깔리는데 그 분야의 탑이었던 영국인 기술자들이 대거 불려왔다. 톨스토이 소설에도 제정 러시아에 철도 부설차 온 영국인들이 등장한다. 이들에게 본국에서 인기 높은 볼러 모자를 팔아보겠다고 돈 들여 수입을 했는데, 아뿔사 먼 바닷길 돌아 어렵사리 들여온 모자가 주문 잘못으로 죄다 사이즈가 작았던 것이다. 남자들의 대두에 들어가지 않는 이 애물단지를 어쩌나.
그러나 알래스카에 가서도 냉장고를 판다는 게 장사꾼 아닌가. 이 모자로 말할 것 같으면 지금 패션의 본고장 유럽에서 귀부인들이 너나없이 쓰고 다니는… 판매 대상을 현지인들에게 돌려 풀어낸 이 구라가 평소 유럽문물에 동경심이 컸던 안데스 산간의 여성들에게 먹힌 것이다. 그 모자를 쓰면 자식들을 쑥쑥 잘 낳는다네, 그런 소박한 미신도 끼어들었다.
이렇게 볼리비아의 국민적 자부심이 된 볼러 모자는 일종의 사회적 신호가 되기도 한다. 처음 만난 남녀가 상대의 왼손 약지에 반지를 꼈는지 살피듯이 모자가 신호등 노릇을 한다.
정가운데로 똑바로 쓰면 유부녀 즉 임자 있는 몸, 빨간 불. 한쪽으로 삐딱하게 쓰면 싱글 혹은 미망인, 파란불. 이런 농담까지 한다. 뒷통수에 걸쳐서 쓰면? 그건 애매모호한 상태 즉 내 마음 나도 몰라라.
어찌보면 전통의상의 뿌리로 내세우기에는 우스꽝스럽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내 생각은 다르다. 세상은 넓디 넓은데 언제까지 “우리것이 좋은 것이여”에 머물러 있을 것인가. 잘 받아들여 내것으로 삼으면 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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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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