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이민 백년, 이 말을 들은 지 오래인데 솔직히 별 감흥은 들지 않았다. 아무래도 동부에 첫발을 디뎌서인지 하와이 사탕수수밭까지 더듬더듬 나의 뿌리를 뻗어 보기에는 지리적으로 너무 멀었다. 그저 관념적으로, 선언적으로 내세우는 캠페인 구호 같다고 할까. 백주년을 기념한 여러 행사들이, 미안하지만, 살짝 공허하게 느껴졌다.
스스로의 정체성을 70년대 본격화된 대량이민 세대에 맞추어 지내왔다. 국민학교 시절부터 불기 시작한 이민 바람으로 듬성듬성 떠나보냈던 몇몇 어릴 적 친구들이 내게는 미국이었고 미국동포였으니까.
역사책 전문 출판사 푸른역사에서 나온 ‘1902년, 조선인 하와이 이민선을 타다’를 읽기 전까지의 얘기다. 이제는 다르다. ‘안재창의 가족 생애사로 본 아메리카 디아스포라’라는 부제를 단 이 책은 안씨 개인의 일대기를 문중 후손인 필자 안형주씨가 오랜 시간과 품을 들여 사료를 추적하고 정리해서 2013년에 나왔다.
구한말 경기도 양주의 몰락한 향반의 집안에서 이민선을 탄 배경으로 시작해서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본토 밀입국, 네브라스카 평원지대의 농장 개척, 자동차 산업으로 번창하던 디트로이트에서 뛰어든 중국식품 도매업에 이르기까지 마치 미국의 서부개척사가 역방향으로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한 사람과 그 가족의 행적을 담은 일종의 미시사인데 내게는 웅장한 민족 영웅담으로 다가왔다. 하와이와의 지리적 거리, 또 한 세기라는 시차가 사라지며 내 얘기, 우리 이웃의 지금 모습을 보는 듯 했다. 흔히들 자녀교육 같은 허울로 가리고자 했던 이민의 본 모습, 먹고 살기 위해 낯선 땅에 부딪쳐 때론 성공하고 때론 실패하며 뿌리를 내려가는 그 몸부림이 그때나 지금이나 고스란히 닮아 있다는 걸 이제사 보게 된 것이다.
이민(移民)은 유민(流民). 떠돌이 백성의 사연을 제대로 기록하는 것이 동포언론의 할 바인데, 현직에서 뛰던 십여 년 동안 나는 그렇게 열심이지 못했다. 후회된다.
안재창과 그를 동행한 무리들에 정서적으로 바짝 다가가게 된 대목은 그들의 사업 아이템이었던 숙주가 등장하면서다. 숙주를 앞세워 우리보다 앞서 형성된 중국인 커뮤니티에 뿌리를 내렸다.
그로서리 마켓에서 스탁을 하면서 유한양행의 유일한 박사가 창업했다는 라초이(La Choy) 간장을 만났을 때의 감격이 떠올랐다. 욕조에서 숙주나물을 키워 병에 담아 팔면서 출발했다는 그 신화.
안씨 역시 중국식품 도매업에 뛰어들었고 숙주가 주력이었다. 숙주는 20세기 초반 대유행을 했던 중국음식 찹수이(Chop suey)에 없어서 안 될 식재료다.
요즘은 중국식당이나 캐리아웃 메뉴에서 찾기 어려운데 당시에는 미국인들이 떠올리는 중국음식의 대명사였다. 청나라 대신 이홍장이 미국을 방문해서 하루는 저녁때를 놓쳤는데 허름한 중국인 함바집에서 후다닥 차려서 내온 것이 원조였다나 하는 썰은 그야말로 썰일 뿐. 현지 재료로 남은 것 이것저것 모아 볶아 내놓는 한끼, 왠지 그 맥락이 한국의 짜장면에 닿아 있지 않은가. 중국사람은 모르는 중국음식.
중국집을 짜장면집이라고 불렀듯이 당시 미국에는 ‘찹수이 하우스’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이탈리안의 피자처럼.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미국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1929년 작품 ‘찹수이’에 그 모습이 남아있다. 몇 년 전 9천2백만 달러에 팔려 기록을 세웠다는 그림이다.
최근에 알았는데 대표적인 태국음식으로 통하는 팟타이 또한 그 나라의 오랜 전통음식이 아니라고 한다. 화교의 영향 아래 20세기 중반에 ‘발명’이 된 국민음식이라고.
찹수이, 짜장면, 팟타이 모두 현지에 적응하는 우리 이민자들을 닮았다. 유명인도 아니어서 알 도리가 없었을 안재창이라는 인물이 숙주와 돼지고기로 찹수이 재료 도매업을 일군 사연, 그게 느슨하지만 왠지 운명적으로 엮이는 서사로 읽히는 데에는 이렇게 먹고 사는 일상이 뒷받침 되고 있다.
여러 사진과 신문 기사, 행정기록들이 촘촘한 이 책을 마치면서 필자의 자료수집 노력에 존경심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저물어 가고 있는 대량이민 세대의 기록들이 이렇게 정리되고 발굴될 수 있을 것인가. 글쎄. 이 칼럼을 통해 나름 그 과정에 일조하고자 글을 쓴다고는 했는데 턱없이 부족했다. 아쉬움을 남긴 채 연재를 마친다. 2년 반 격주로 지면을 할애해 주신 신문사와 두서 없는 제 넋두리를 들어주신 독자들께 감사를 드린다. <끝>
<
정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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