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연가시’서 아줌마 경순 역
문정희는 빳빳한 명함을 건네주며 "문정희입니다"라고 상냥하게 말했다. 배우가 매니저의 명함이 아닌 본인 명함을 가지고 다니는 건 매우 드문 일이다.
"일반 회사원 같다"는 우스갯소리에 "저도 배우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을 뿐이지 평범한 사람들과 똑같다. 단지 다양한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게 차이라면 차이"라며 웃었다.
다음 달 5일 개봉하는 영화 ‘연가시’에서 여자주인공 경순 역을 맡은 문정희를 28일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연가시’는 ‘바람의 전설’(2004), ‘쏜다’(2007)를 연출한 박정우 감독의 세 번째 장편영화다. 사람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이상 기생충 ‘변종 연가시’를 소재로 한 이야기다.
그는 "시나리오와 출연진을 보지도 않은 채 박 감독의 제안이기에 선뜻 응했다"고 했다. 박 감독의 전작 두 편에 이미 출연한 인연이 판단의 준거점이 됐다.
"감독님에 대한 믿음도 컸고, 인간적인 의리도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문정희는 영화에서 주식투자로 쫄딱 망한 제약회사 영업사원 재혁(김명민)의 아내 경순 역을 맡았다. 살기도 버거운데 자녀와 함께 연가시에 감염돼 고통받는 ‘이중고’를 견디는 인물이다.
이런 부박한 현실과 싸우는 그의 무기는 긍정과 웃음이다. 남편의 짜증을 일일이 받아내고, 집안 재산을 말아먹은 시동생이 사온 피자도 넉살 좋게 먹어치운다. 너무 착해서 현실에서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유형이다.
실제 성격을 물어보자 그는 "긍정적이지도 부정적이지도 않다"고 했다. 어렸을 적에는 "염세적이었다"고까지 했다.
"고교 때까지 전 염세적인 인간형이었어요. 교과서보다는 소설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연극을 해보라는 친구의 조언에 따라 연극과에 지원해 합격했죠. 그러면서 연기 인생을 시작하게 된 겁니다."(웃음)
경순은 삶과 죽음을 오간다. 그녀의 몸에 숙주 한 연가시가 폭주하면 좀비가 피를 찾듯 물을 찾는다. 연가시가 잠잠할 때는 인자한 어머니이자 아내의 모습을 되찾는다. 극단적인 감정의 진폭 속에서 균형점을 찾기란 쉽지 않았을 터.
"연가시가 요동칠 때도 좀비같이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입 주변에 피 분장도 해보고 토사물을 덕지덕지 묻혀보기도 했어요. 너무 과장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잘 나왔는지 모르겠네요."
김명민과의 호흡을 물으니 "좋았다"며 "명민 선배는 연기를 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내는 데 탁월한 역량이 있다"고 했다. 이어 "촬영에 들어가기에 앞서 등장인물들과 충분히 대화하고, 철저하게 준비도 한다"고 설명했다.
연기 외에 최근의 화두에 대해 물어보니 "생각 버리기"라고 했다. 그는 틈날 때마다 이리저리 기웃대는 사념 덩어리를 재보고, 버리거나 기억의 창고에 저장한다.
등산은 ‘생각 교통정리’의 좋은 방법이다. 그는 홀로 등산하러 다니면서 생각을 버리고 또 채운다.
"옷 가운데 가장 많은 옷이 등산복이에요. 많은 생각을 지닌 채 산에 오르는데 내려올 때 쓸데없는 생각을 버릴 수 있어 좋아요. 제가 하는 생각의 90%는 쓸데없는 것 같아요. 등산을 하며 저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어 즐겁습니다."
그동안 문정희는 ‘연애시대’(2006), ‘달콤한 나의 도시’(2008) 등의 작품을 통해 단아하고 차가운 도시 여성의 이미지로 어필했다. 지난해 출연한 드라마 ‘사랑을 믿어요’에서 아줌마 영희 역은 호평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독(毒)도 있었다. 아줌마 역할은 오랫동안 쌓아온 단아한 이미지를 단박에 밀어냈기 때문.
"한때 ‘도시적이다’ ‘단아하다’라는 수식어가 제게 붙어 다닌 시절이 있었어요. 한순간에 없어지더군요. 확실히 대중은 캐릭터로 기억하니까요. 이번에도 어쨌든 아줌마 역할이죠. 이제는 아줌마 이미지를 벗고 싶어요. 많이 하지도 않았는데 그런 이미지가 굳어지면 다음 작품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을 테니까요."(웃음)
문정희는 재주 많은 연기자다. 고교 졸업 이후부터 판소리를 배운 그는 뮤지컬 ‘록키호러 픽처쇼’와 ‘그리스’의 주연을 맡을 정도로 노래 실력이 탁월하다. 살사 댄스 전문가로 세계대회에 출전하기도 했다.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글을 쓰고, 언젠가 멋진 다큐멘터리도 만들어 보고 싶어한다.
"배우로서는 작품 욕심이 있어요. 사랑에 빠진 로맨스의 주인공이나 팜므파탈 역할도 좋아요. 매력이 있는 캐릭터를 연기하고 싶어요. 예쁘다는 칭찬보다는 ‘연기 실감났어’라는 칭찬을 더 좋아해요. 그보다는 ‘네 연기가 극에 잘 녹아들어 갔어’라는 칭찬이 더 좋겠죠.(웃음) 작품의 흐름을 정확하게 따라가고 있다는 거니까요. 그건 (연기) 센스고, 지성인 거죠. 사람과의 관계 면에서는 겉치레보다는 진실한 관계를 맺고 싶어요.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되면 좋을 것 같아요."
(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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