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밟은 미국 땅은 University of Kansas가 자리잡고 있는 캔자스주 로렌스 시이다. 사실은 디트로이트와 워싱턴에 있는 대학들에서도 합격 통지서를 받았지만 캔자스 대학을 택했다. 학비 부담 때문이었다. 미국에 오기 전 나는 미국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길거리가 금으로 뒤덮힌 줄 알았다. 그리고 도착해서 받은 첫 느낌도 크게 틀리지 않았다. 길에 돈이 굴러다니는 것 같았다. 어느 구석을 봐도 풍요롭고 깨끗하게 단장 되어있었고 정성스런 사람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사람들은 왜 그렇게도 순한지! 한국에서 자랄 때 “눈 뜨고도 코 베이는 세상이니 조심하라"른 충고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는데 캔자스에서 만난 미국 사람들은 오히려 너무 순둥이 같았다.
자동차 경적을 울린다든지 길에서 큰소리로 다투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모두들 속삭이듯 말을 해서 미국 사람들은 목소리가 작은가 의문까지 들었다. 내가 몸에 익은 ‘목소리 큰사람이 이긴다’라는 사고방식은 이들에게는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 완전히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된 기분이었다.
반면 떠나온 조국 한국만 떠올리면 가슴 아픈 기억만 났다. 신학교에서 아픈 기억, 군대에서 참담한 기억, 집안에서 쉽지 않았던 일들…매일 전쟁처럼 계속되던 생존을 위한 싸움, 전경이니 군인이니 학생이니 하며 최루탄이 난무하며 돌과 화염병에 뒤덮혔던 서울의 기억… 매일같이 거짓을 말하는 독재자들과 이들의 앞잡이 정치인들, 먹고 살기위해 거짓된 현실과 타협을 하며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기성세대들…이 모든 추잡한 현실을 다 잊고 싶었다.
나는 캔자스가 너무 좋았고 미국이 너무 좋았다. 이 나라는 솔직하고 부지런한 사람이 보상을 받는 곳이었다. 소위 아메리칸 드림을 이룰 수 있었다. 누구도 내가 무슨 연줄이 있는지, 막말로 무슨 “백”이 있는지 ane는 자가 없었다. 그저 성실한 것과 똑똑한 것으로 나를 판단해 주었다. 물론 당시 미국 사회에 팽배해 있는 인종 차별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돌아봐도 부지런한 것 하나로 여기까지 온 것 같다. 나는 스스로 아메리칸 드림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캔자스에서 학위를 마치고 다시 돌아가려했던 가톨릭 대신학교에서는 복학을 거부 했다. 하지만 미국의 뉴왁 신학교로 부터는 두말없이 입학 허가를 받았다.
지금은 뉴욕 일원에서 가장 오래된 한인 성당의 본당 신부가 되었다. 돌아볼 때 나의 바람과 꿈이 다 이루어진 것 같다. 이렇게 미국은 나에게 감사한 나라가 되었다. 근면 성실하게 열심히 일하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어메리칸 드림은 살아있다.
조민현(뉴저지 메이플우드성당 본당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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