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 우리교회 도서관에서 좋은 책 한 권을 발견했다. 에이미 추아의 <제국의 미래>라는 책이었다. 좀 학적이고 두꺼워 다 읽지는 못했지만 장 별로 관심 있는 부분은 단숨에 읽었다. 워낙 내용이 좋을 뿐 아니라 탄탄한 논리에 방대한 리서치가 동반된 양서였기 때문이다.
난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딸 생각을 했다. 눈은 책 내용에 가 있었지만 마음 한 구석에선 이 책 작가와 내 딸을 오버랩시키고 있었다. 이유는 부분적 동질성 때문이었다. 작가는 중국인 2세 여인이다. 예일대 법대 교수다. 사진에서 비치는 똑 부러진 모습부터가 무척 인상적이었고 그 강렬한 인상은 그녀의 글 속에 고스란히 다 드러나 있었다. 그래서 내내 이 여인과 외모나 입장이(이민자라는) 비슷한 내 딸도 앞으로 이런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내가 말하는 영향력이란 그녀의 사회적 위치 같은 건 결코 아니다. 그녀가 유명대 교수라는 점, 글과 논리로써 정가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실세 파워 모습 같은 게 아니다. 또 그녀가 동양인으로서 미 ‘주류사회(main stream)’에 이미 들어가 있어서도 아니다. 다만 그녀의 박식함, 지성미, 예리한 판단력, 이런 것들로써 이토록 좋은 책을 쓸 수 있다는 것, 또 그로 인해 다른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력을 줄 수 있다는 게 부러웠을 뿐이다. 그래서 내 딸도 이랬으면 했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이번에 또 일을 냈다.
라는 책을 써 장안에 화제가 되고 있다. 직역하면 <호랑이 엄마가 부르는 전쟁의 노래> 정도가 될 수 있을까. 그녀는 이 책을 통해 미국 엄마들의 느슨한 양육법을 호되게 질책한다. 반면 자신의 배경이자 무대인 ‘중국’ 방식의 강성 양육법을 옹호한다. 어찌 보면 그냥 그러려니 하며 넘어갈 수도 있는 사안이나, 때마침 후진타오의 방미까지 겹쳐 인터넷을 후끈하게 달구는 아젠다가 되어버렸다. 특히 자존심 강한 미국인들의 시스템을 꾸짖는 식이 되어버렸으니 더 그럴 수밖에 없게 되었다.
아직 이 책을 구입하지도 읽지도 못했으나 미리 맘 한 구석이 찜찜해지고 있다. 이토록 양육법이나 교육방식이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만큼 이 사태가 목표하는 종착역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부족하다는 점 때문이다. 그래서 양서 저작을 통해 내 마음에 존경심까지 불러 일으켜준 에이미 추아가 이번엔 사안을 달리해 쓴 이 책이 과연 앞 그 마음과 비슷한 마음을 내게 또 다시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인가는 아직 의문이다.
이유는 영역이 달라져서만은 아니다. 다시 말해 ‘무거운’ 정치 사회를 논하던 그녀가 ‘가벼운’ 자녀 양육법으로 턴한 때문만은 아니다. 솔직히 요사이의 이런 논의들은 주로 자녀 양육을 통한 성공의 도착지점이 실종된 상태에서 이뤄지는 경우가 더 많은데, 혹시 그녀의 논리마저도 결국 그 부류에서 멈춰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서서다. 그리고 실제로 이 책은 어쨌든 그런 방향으로 이미 담론의 불씨를 댕겨버린 것도 사실이다.
‘어떻게’는 ‘무엇’을 전제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무의미하다. 자녀양육, 다 좋다. 그게 추아처럼 호랑이식이든 미국 엄마들처럼 방목식이든 방식은 그 다음 문제다. 그토록 열심히 양육하고 교육해서 아이가 성공했다 치자. 그럼 그 다음은 뭔가? 주류사회에 들어가 짭짤한 수입에 좋은 집 좋은 차에, 고생한 이민자 부모와는 차이 나게 사는 것, 이게 달까? 그러면 정말 다 된 건가? 잘 지켜보면, 대부분의 이민자들이 그토록 자녀양육에 열 올리는 이유가 이와 비슷한 종국의 목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말은 안 해도 속은 다 그렇다.
‘무엇’이 ‘어떻게’를 좌우한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달달 볶아 그 자리에 올랐는데, 올라 가봤더니 아무 것도 없더라인 것이다. 얼마나 허무한가? 그래서 글 초두에서 말했던 영향력 문제로 다시 가고 싶다. 내가 만약 부모로서 내 딸을 달달 볶는다면 그 쪽으로 달달 볶고 싶다. “공부해서 남 주냐? 오냐, 남 줘야지. 네가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딴 게 아냐. 네가 얻은 좋은 것을 남에게 줘서 세상을 살리기 위해서야. 너 혼자 잘 살려고는 아니다.”
한국의 장관 후보들을 보라. 화려한 학력과 경력 속에 어둔 그늘들이 있다. 위장전입, 군 미필, 탈세 의혹 등, ‘무엇’ 없는 ‘어떻게’에만 몰입했던 결과가 급기야 치부로 막 드러나고 있는 중이다. 개인사만이 아니다. 교회도 가정도 마찬가지다. ‘무엇’ 없는 ‘어떻게’가 참 많다. 우리의 교회들, 각 가정들, 특히 자녀교육에 열 올리며 거기에 올인하는 부모들, 경각심을 갖기 바란다. ‘무엇’ 없는 ‘어떻게’는 나와 교회와 내 자녀들의 미래를 무척 허무하게 만들어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라. ‘어떻게’는 일단 뒤로 미뤄야 한다. ‘무엇’부터 잘 정립하도록 하라.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