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 출신 C씨, 러시아 근무중 지난해 미국 망명
북한출신 망명인 C씨가 한 식당에서 지인을 기다리고 있다.
2010년 3월, 러시아 하바로스코 지역에서 북한에서 파견된 임업 노동자로 근무하고 있던 C씨는 오랜 준비 끝에 용기를 내어 주 블라디보스톡 한국총영사관을 방문했다. 자유와 인권, 일한 만큼 소득을 거둘 수 있는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기회를 찾아 미국으로 망명을 신청하기 위해서였다. 주블라디보스톡 총영사관 관계자들, 그리고 유엔망명자에이전시(UNHCR)측은 자신이 태어난 국가와 가족을 떠나야 하는 쉽지 않은 결정을 내린 C씨의 망명이 실현될 수 있도록 기꺼이 협조해 주었고, C씨는 9개월가량 블라디보스톡 총영사관에서 제공한 보호시설에서 지낸 후 지난해 12월 20일 마침내 시카고에 도착, 현재 자신이 오랫동안 소원했던 자유의 품에 안겨 살아가고 있다.
C씨는 평안북도에서 분리된 자강도 강계시 출생으로 그곳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후 한 생산 공장에서 트럭 운전수로 근무하고 있었다. 북한에서의 생활은, 물론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주변에는 먹을 것이 없어 목숨을 잃는 이웃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C씨의 경우 그런대로 먹고 살아가는 데는 크게 지장이 없는 형편이었다. 그런 C씨가 자유와 자본주의, 균등한 기회의 힘을 깨닫게 되고, 북한이 자신이 배웠던 것보다 훨씬 더 페쇄적인 국가였으며 남한은 오히려 부강하고 역동적인 나라였음을 알게 된 것은 한국 및 세계 여러 국가에 대한 비디오 영상물 등을 접하게 되면서부터였다. C씨는 “북한은 중국과 교역이 활발하기 때문에 중국으로부터 한국의 드라마나 영화, 미국 영화 등이 많이 들어온다. 물론 모두 불법이기 때문에 갖고 있다 적발되면 처벌을 받게 되지만 이미 내가 북한을 떠난 2007년전에만 하더라도 너무나 많은 영상물들이 들어온 터라서 규제를 한다는 것조차 어려운 상황”이라고 전했다. 비디오를 통해 접한 한국, 그리고 미국을 비롯한 여러 자본주의 국가의 모습은 자신이 상상했고 교육을 받았던 내용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지금은 제목이 기억이 나지도 않지만 저 역시도 한국 드라마를 봤어요. 그때의 느낌을 표현하기가 쉽지 않군요. 화면 속에 비치는 사람들의 모습이 자유롭고 편안하며 뭔가 억눌리는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C씨는 세월이 흐를수록 굳이 ‘사회주의’라는 이념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자유,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혜택이 크다는 사실을 점점 깊이 있게 깨닫게 됐다. C씨는 “당장 중국을 보더라도 과거에는 경제적으로 힘들었으나 이제는 점점 부강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모두가 자본주의를 어느 정도 허용하고 개혁, 개방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북한은 여전히 폐쇄적이고 고립돼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북한의 경우 일부 계급층은 해외로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고 또 선진국의 교육을 경험하는 등 다양한 기회를 누릴 수 있지만 일반 주민들은 그렇지 않다. 우리들에게는 학업, 경제생활 등 일상에 있어서 규제와 감시는 있어도 균등한 기회가 없다”면서 “이런 사실들을 느끼고 깨닫게 되면서부터 자유의 필요성을 인지하기 시작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던 중 C씨에게 임업노동자로서 러시아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그리고 그곳에서도 역시 C씨는 러시아인들의 생활과 이념에 대한 가치관은 자신이 북한에서 듣고 배웠던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다. “북한에서 제가 접했던 사실은 러시아인들은 ‘자본주의를 싫어한다’는 것이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많은 주민들이 자본주의가 허용되고 있다는 것 자체를 힘들게 여기고 있다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러시아에서 직접 생활해보니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많은 러시아인들이 자유, 그리고 노동하는 만큼 어느 정도의 대가가 주어지는 생활에 크게 만족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지요.”
C씨는 북한에서부터 자유과 인권, 새로운 기회를 찾아보고 싶다는 마음을 어느 정도 품고 있었지만 러시아에서 생활하면서부터 자신의 꿈을 실현시켜야 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난 후 C씨는 자신의 이같은 계획과 의지를 우스리스크 미르교회(평화교회), 하보로스크 생명수 교회 등 한인교회에 출석하고 있던 지인들에게 알렸고 그들과 UNHCR, 블라디보스톡 총영사관 등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지난해 12월 시카고 땅을 밟을 수 있었다. C씨는 망명국가를 미국으로 선택한 데 대해 “특별한 이유는 없었고 미국의 자본주의가 가장 많이 발달했다고 느꼈다. 요즘에는 망명신청을 하는 북한 주민들 중에 미국을 선택하는 이들이 종종 있다”며 “한국은 별다른 이유는 없지만 처음부터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망명을 신청할 때는 물론 고향에 남아 있는 부모, 형제들의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C씨는 “아직도 북한에 부모님을 비롯 가족들이 계시기 때문에 당연히 걱정이 되고 사실 가족 생각, 그리고 갑자기 주변의 환경이 많이 바뀐 이유에선지 요즘엔 잠도 잘 못 이룬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근래엔 탈북자들이 워낙 많기 때문에 북한 정부에서도 그 가족들을 가두거나 수용소로 보내는 것 보다는 감시 정도 선에서 그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시카고 인근 서버브의 한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는 C씨는 비영리단체인 ‘월드 릴리프’(World Relief)의 도움을 받아 생활하고 있다. 다행히 월드 릴리프에선 아파트 렌트비와 150달러 정도의 생활비, 그리고 C씨가 언어를 빨리 익힐 수 있도록 ELS 과정 수업료를 지원하고 있다. 실명을 거론하긴 어렵지만 C씨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몇몇 시카고 한인들도 액수의 크고 작음을 떠나 물심양면으로 돕고 있다. 하지만 이 모든 지원은 영구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C씨는 당연히 앞으로 혼자서 감당해야 하는 시카고에서의 생활을 어떻게 꾸려나갈지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다.
C씨는 “World Relief의 지원은 오는 3월 17일을 끝으로 중단되기 때문에 그 이후부턴 내 스스로가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한다. 빨리 직장을 구해야 한다”며 “이왕 시카고로 온 이상 직종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을 할 것”이라고 각오를 전했다. 그는 “작은 바람이 있다면 내가 운전을 할 줄 알기 때문에 트럭 운전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트럭 운전을 가르치는 학원이 있는데 금전적인 형편상 이 학교에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도움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동이 자유로울 수 있도록 낡은 차라도 한 대 있었으면 좋겠다”고 전하고, “뜻있는 분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도움을 기대함과 함께 그동안 자신을 도와준 여러분들께 지면상으로나마 감사하다는 뜻을 전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박웅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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