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연방의원, 한인 정치사 새 지평
1992년 11월4일 4.29폭동의 아픔에서 시름하고 있던 한인사회에 낭보가 날아들었다. 연방하원의원 41지구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로 출마했던 김창준씨가 당선된 것이다. 그의 연방의회 입성은 한인 정치 도전사에 큰 획을 긋는 일대 사건이었다. 때문에 나중에 선거자금법 위반으로 결국 정치권에서 물러나야 했을 때 한인사회가 받은 충격 또한 클 수밖에 없었다.
1961년 유학, 성공한 사업가
다이아몬드바 시의원으로 기반
신설 41지구 내리 3선
폭동피해 한인들 기쁨도 잠깐
불법 선거자금 불거져 좌초
‘값비싼 경험’후진들에 조언
김창준(68). 1961년 미국에 유학 와 USC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하고 1977년 다이아몬드바에 ‘제이 김 엔지니어링’을 설립, 한때 미 전국 500대 설계전문회사로 키울 정도로 잘 나가던 사업가였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정치에 눈을 돌린다.
그의 원래 목표는 캘리포니아주 하원의원이었다. 그것도 “정치 한번 해 보겠다”는 막연한 생각에서였다.
그는 이를 위해 정치적 기반을 다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 시정부 관련 일에 먼저 발을 들여놓는다. 전공이 토목공학인 만큼 시 플래닝 커미션이 시작이었고, 그의 전문성이 시정부와 주민들에게 어느 정도 알려질 무렵이었던 1990년 시의원에 도전해 당선됐다. 이어 시장에 오르며 ‘제이(Jay) 김’이란 정치 초년생의 등장을 알리게 된다.
정치는 능력도 중요하지만 운도 따라야 한다는 말이 있다. 행운의 여신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때마침 인구센서스 조사 결과에 따라 인구가 늘어난 지역에 대한 선거구 재조정이 이뤄지면서 LA, 오렌지, 샌버나디노 등 3개 카운티가 혼합된 ‘41지구’라는 새 지역구가 탄생했다. 또 그 당시 캘리포니아 지역 공화당 내에서 나름대로 입지를 형성하고 있던 척 베이더 주하원의원과 백악관 고문변호사 출신인 짐 레이시가 예선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이며 표가 분산된 것도, 그에게는 득이었다.
지역구가 공화당 절대 우세지역이어서 6월 예선이 사실상의 결선이나 다름없었던 선거였기 때문이다.
김창준 전 의원은 주의회에서 연방의회로 방향을 틀어야 하는 상황에서 그는 “그 당시 고민이 무척 컸고, 무리라는 생각도 했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예상대로 11월4일 총선에서 가볍게 승리하며 연방의원 배지를 가슴에 달았고, 이후 그는 어디를 가나 ‘스타’였으며, 주목받는 존재가 됐다.
김창준 전 의원의 불법 선거자금 문제를 다룬 주요 일간지들. 이 문제로 김 전 의원은 4선 도전에서 실패의 쓴 맛을 보며 정계를 떠나야 했다.
그가 연방의원에 오른 의미에 대해 저마다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때만 해도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던 연방의회 입성이 현실로 나타나면서 “우리도 이제 주류정치권에 진입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은 것이었다. 또 폭동으로 모든 것을 잃고 허탈감에 빠져 있던 한인사회에 새로운 용기와 힘을 실어준 것이었다.
하지만 김 전 의원은 의원직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비정한 정치세계의 현실에 몸을 떨어야 했다.
당선되자마자 폰태나 거주 백인 남성이 전화를 걸어와 “한국으로 돌아가라”며 시비를 걸었고, 다른 아시안 커뮤니티로부터는 “왜 하필 공화당이냐”며 민주당으로 말을 갈아탈 것을 요구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의정생활 시작 반년이 지날 무렵이었던 1993년 7월 LA타임스가 불법 선거자금 모금 의혹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이 보도가 나가자 지역 신문들로 뒤이어 이를 크게 보도했다.
연방수사국(FBI)의 조사는 치밀하게 오랜 시간을 갖고 진행됐다. 무려 4년이었다.
미국의 정치 자금법을 잘 몰랐던 한국 지상자들은 물론 그에게 선거자금을 기부했던 일반 한인들까지 조사를 받았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조사를 받은 인사가 수백 명은 될 것이란 얘기가 공공하게 나돌 정도였다.
이 과정에서 한국 기업들도 불법 선거자금 기금과 관련, 엄청난 벌금을 물어야 했다.
김 전 의원은 “일간지들이 마치 순서를 바꿔가며 작심한 듯 문제를 계속 보도하는 통에 정신을 못 차릴 정도였다”며 “재선에 성공하자 더욱 강한 비판기사가 실렸다”고 주장했다.
3선 고지까지 올랐던 그는 1998년 선거법 위반 5개 경범혐의에 대해 유죄를 인정하고, 벌금형으로 사건을 매듭지었지만,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어 4선을 겨냥했던 그 해 예비선거에서 패하며 정계를 물러나야 했다. 이후 1999년 샌버나디노 카운티 랜초쿠카몽가 지역을 중심으로 한 42지구 연방하원의원 선거 출마설이 나돌기도 했지만, 더 이상의 진전은 없었다.
지난 10일 전화 인터뷰에서 그는(현재 워싱턴 거주) 연방 하원의원 시절에 대해 몇 가지 아쉬움을 털어놓았다.
첫 번째는 좀 늦더라도 주의회에 먼저 진출해 미국 정치의 생리를 제대로 파악했더라면 그 같은 결과는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두 번째는 그 당시 자신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아끼지 않은 한인사회에 관한 것이다.
그는 “지금도 도움을 주신 분들을 기억하고 있으며 또 감사하고 있다”면서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고 용서를 빌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불법 선거자금 의혹이 제기된 이후 정신적으로 매우 힘들었던 시기였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그는 지난 자신의 의정활동 시간에 대해 “잃은 것이 별로 없다”고 단언한다. 오히려 값진 교훈들을 많이 배웠고, 이제 후배들을 위해 그 경험과 노하우를 전수할 때란 것이다. 비록 그 당시 첫 부인과의 이혼까지 겹치며 지옥과 천당을 오갔지만(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지금은 모두 훌훌 털어버렸고 모든 것이 행복하다고 말했다.
은둔생활을 접고 2~3년 전부터 한국의 대학 강단에서 강의도 하고, 부인 제니퍼 안씨가 운영하는 광고회사 일을 돕고 있는 그는 한인 정치 지망생들을 위한 조언에서 지역구를 잘 선택할 것과, 그 곳에서 지명도를 높일 수 있는 기반을 다질 것을 주문했다. 또 한인사회는 현재의 강력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단일창구를 만들어 정치인들에게 분명한 조건을 제시하고, 관철시키는 역량을 발휘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미국 정치에서 실탄인 ‘돈’은 언제든지 위력을 발휘한다는 경험 때문이다.
그는 새해부터 정치 지망생 육성사업에 자신의 마지막 정열을 불태울 생각이다.
김 전 의원은 “한인 의원이 연방의회에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하늘과 땅 만큼이나 크다”고 후진양성에 강한 집념을 감추지 않으면서 “내가 너무 일찍 출마했던 것 같은데, 지금 나왔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고 농을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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