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트 마운틴’(1999년 제작)에서 열정적인 연기를 보여주고 있는 오순택씨. 이 작품은 TV 테크놀러지 매거진으로부터 최초의 고화질(HD) 영화로 인정받았다.
오씨가 가장 기억에 남는 출연작으로 손꼽는 TV드라마 ‘에덴의 동쪽’. 미스터 리 역할을 맡으며 작품의 흐름을 이끌어 호평을 얻었다.
황성락 기자의 다큐멘터리 ‘타운50년’
할리웃에 한인 알린 ‘전천후 연기자’
“나는 하인이나 중국인 역은 하지 않습니다”
1981년 ABC 방송을 통해 인기리에 미 전역으로 방송됐던 TV 미니 시리즈 ‘에덴의 동쪽’(East of Eden). 제작에 앞서 배역 선정을 맡은 제작사 고위 관계자의 연락을 받고 뉴욕에서 밤 비행기로 막 LA에 도착한 한 아시안 배우가 배역에 관해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럴 줄 알았네. 한번 책을 읽어보도록 하게. 그리고 두 시간 뒤 다시 만나 얘기하세” 그리고 얼마 뒤 자신의 역할이 차지하는 비중을 알게 된 이 배우는 배역을 승낙했다. 다름 아닌 오순택씨였다. 그가 ‘미스터 리’라는 인물로 발탁됐다는 사실은 프랑스에서도 화제가 될 정도로 큰 관심사였다.
1965년‘라쇼몽’으로 브로드웨이 데뷔
‘007’ ‘에덴의 동쪽’등 40년간 100편
아시안 배우 차별맞서 권익단체 창설
007 시리즈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편에서 제임스 본드 역을 맡았던 로저 무어(오른쪽)와 열연중인 오순택씨(가운데).
한국에서 대학(연세대 정치외교학과)과 군복무까지 마치고 배우의 꿈을 이루기 위해 1959년 혈혈단신 미국 땅을 밟았던 오씨. 그는 뉴욕의 배우 전문학교 ‘네이버후드 스쿨 오브 디어터’와 UCLA 대학원에서 공부하며 연기자로서 기반을 탄탄히 다지며, 할리웃 입성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당시 1960~70년대 할리웃 세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2차 대전 당시 할리웃은 반일 선전영화 붐이 일었고, 정식 배우가 아닌 아시안들까지 일본인으로 등장시켰다(일본인들은 격리 수감돼 있던 시절이어서 한인 또는 중국인이 대부분이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아시안 이미지를 훼손하는 것이었고, 60년대 들어서도 그대로 이어져 아시안 배우 중에는 프로가 없는 것처럼 비쳐지고 있었다. 이로 인해 70년대에서도 이같은 편견 때문에 파란 눈을 가진 배우들이 아시안 역을 맡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1965년 오씨는 연극 ‘라쇼몽’ 출연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미국에서의 연기생활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아시안 배우들의 권익 향상이 시급하다는 현실에도 눈을 뜨고 있었다.
그래서 그 해 그는 ‘이스트웨스트 플레이어스’란 단체를 만들었다. 내적으론 아시안 배우들의 실력 향상을, 외적으론 유능한 배우들의 존재를 알리기 위함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1970년대 중반에는 ‘Asian Pacific American Artists’란 단체를 조직하고 1~2대 회장을 맡으면서 영화 제작사들과 아시안 배우에 대한 대우 등 실질적인 문제를 논의하기도 했다.
단역에서 출발했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연기력은 점차 많은 작품 출연기회를 제공했다. 그는 항상 조금씩 자신의 역할과 비중이 커질 때마다 “더 잘할 수 있다”며 자신을 채찍질했다.
한국에서는 ‘5-0 수사대’로 알려졌던 ‘하와이 5-0’를 비롯해 ‘007 황금 총을 가진 사나이’(1974년) ‘태평양 서곡’ ‘레드선 라이징’, 만화영화 ‘뮬란’(목소리 연기), ‘프레지던트맨’ 등 수많은 영화와 TV 드라마(100여편)에 출연했던 것에서 그가 전천후 연기자임을 쉽게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또 한인사회의 연극문화 발전을 위해 1982년 ‘한미극협’을 창단했고, 이후에는 ‘공연예술인 모임’을 만들어 후배들의 기량 향상을 도왔다.
오씨는 “물론 매 순간 어려웠지만 배우생활 중 기억에 남을 정도는 없었던 것 같다”고 말한다.
그는 2001년 8월 40여년간의 할리웃 생활을 뒤로 한 채 귀국했다. 한국종합예술대학 연극원(대학원 과정) 강의를 맡았다가 계명대학교 공연예술대 개설에 참여했다. 현재는 서울예대 석좌교수로 활동중이며, 틈틈이 영화와 연극에도 출연하고 있다.
오씨는 “배우 지망생들에게 이론과 실제의 차이를 극복시키는 게 내 역할로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한국에 거주하는 동안 드라마 ‘로스트’(Lost), 영화 ‘마지막 사무라이’ 등 작품에 출연제의가 있었지만 강의 때문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는 ‘한류’와 관련해 자신이 미국시장 진출 1호로 지칭되는 것에 부담을 갖고 있다. 오씨는 “영화는 분명한 영리사업이지 자선사업이 결코 아니다”라며 “내가 있어서가 아니라 영화제작에 내가 필요하기 때문에 쓰여진 것일 뿐”이란 분명한 현실론을 갖고 있다. 그는 또 한국 배우들의 할리웃 진출에 대해 영어를 극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시간 넘게 진행된 전화 인터뷰를 마치며 “할리웃 생활에서 아쉬웠던 게 무엇이냐”고 물었다.
오씨는 “연극에서는 브로드웨이로 진출했으니 성공했다고 할 수 있고, 영화 역시 일반적인 면에서는 성공이라고 봐 줄 수 있다”면서도 “하지만 작품을 전체적으로 이끌어나갈 수 있는 역을 못한 것이 아마 그럴 것”이라고 말했다.
1930년대 할리웃 진출 ‘선구자’필립 안
필립 안씨가 중국인 역을 맡은 흑백영화.
필립 안(1905~1978). 우리들에겐 도산 안창호의 장남으로 잘 알려져 있다. 조금 더 그에 대해 아는 사람은 그가 한국에서도 인기리에 방송됐던 TV 드라마 ‘쿵후’에서 주인공의 스승으로 출연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그는 한인 영화인들의 할리웃 진출에 물꼬를 튼 선구자적인 인물이다.
1930년대 USC를 중퇴하고 경제적으로 곤란을 겪는 집안을 돕다 영화계에 진출할 당시 상황은 현재와 전혀 달랐다. 지금이야 덴젤 워싱턴 등 흑인 배우들이 주연을 다투고, 한인 1.5~2세들도 주류 연예계 진출이 줄을 잇고 있지만 당시에는 모든 것이 백인 중심이었다. 거꾸로 타인종에 대해서는 배타적이었던 게 당시 할리웃의 비뚤어진 모습이었다.
결국 그에게 맡겨진 역들은 악역이나, 중국 또는 일본인, 하인 등 비중이 적은 것들이었다. 특히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전쟁영화가 봇물을 이루면서 단골 일본군 역을 맡아야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만의 캐릭터를 만들어갔고, 뛰어난 연기력과 미국 태생인 덕에 가능한 완벽한 영어는 그의 입지를 탄탄히 만들어냈다.
오순택씨는 “필립 안은 유창하다는 차원을 넘어 마치 영국의 귀족 같은 화술로 주변을 사로잡았다”며 “아시안 배우로는 가장 어려운 시기에 자신의 위치를 확실히 잡은 분”이라고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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