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총영사관<끝>
“문민정부·폭동 거치며 교민 속으로”
90년대에 들어서면서 LA총영사관은 변화의 시기를 맞는다. 정치적으로 박정희 정권의 철권통치와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지는 군부독재의 어두운 터널을 마감하고 새로운 민주시대가 열리면서 공관 본연의 업무에 더욱 충실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한인사회와의 접촉이 더욱 활발해지면서 마찰과 갈등도 늘어났다.
소탈했던 박태희씨 뇌졸중 비운의 귀국
김명배씨 어려운 한인 챙기기 남달라
성정경씨 은퇴 후 강원도서 농부로 변신
<1997년 5월 박태희 총영사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정상 근무를 못하자 김창수(가운데) 부총영사가 영사관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1989년 2월 부임한 박종상 10대 총영사는 군부독재의 종말과 김영삼 문민정부 탄생이란 역사적 순간의 한 복판에 서야 했다. 그는 특히 김창준씨가 한인 최초의 연방하원의원에 당선되고 정호영씨가 가든그로브 시의원에 선출되는 등 한인사회 정치력 신장의 기쁨을 맛봄과 동시에 1992년 4월19일 땀과 눈물로 이룬 한인들의 수많은 비즈니스들이 폭도들에 의해 불태워지는 쓰라린 이민사를 지켜봐야 했다.
어쩌면 박 총영사는 한인사회가 가장 힘겨워 하던 시절 중책을 맞게 된 셈이다.
그는 폭동이 발생하자 곧바로 공관에 대책위원회를 설치해 운영하는 등 나름대로 신속한 대응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한국정부가 보내온 폭동 피해성금을 놓고 피해자들과 씨름을 해야 했다. 심지어 이 때문에 그는 마약, 노름에 빠졌다는 악성루머에 시달리기도 했다.
박 총영사는 1993년 2월 4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주 루마니아 대사로 자리를 옮겼고, 외교안보 연구원 명예교수를 거쳐 덕성여대 명예교수로 강단에 섰다.
그의 뒤를 이어 부임한 김항경 총영사는 3대였던 노신영 총영사에 이어 가장 잘 풀린 LA총영사로 손꼽힌다.
불과 1년여를 근무한 김 총영사는 캐나다 대사를 거쳐 외교통상부 차관까지 올랐으며, 현재는 강남대 국제학부 석좌교수로 활동중이다.
세련된 매너와 화술을 자랑하던 그에 대한 한인들의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비판론자들은 그를 출세지향적인 외교관으로 평가절하 한다. 반면 또다른 인사들은 폭동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인사회를 특유의 친화력과 뚜렷한 주관으로 안정을 되찾도록 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그는 흑인사회와의 관계증진을 위해 흑인 학생들의 한국연수 프로그램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서영석 전 한인회장은 “항상 미래에 대한 야망이 컸던 인물”이라고 기억하면서 “그같은 모습이 출세지향적이란 지적이 나온 것 같다”고 분석했다.
<평통위원 및 회장 선정은 LA총영사관의 가장 큰 부담 중 하나였다. 1991년 7월 위원선정에 불만을 품은 한인인사가 공관 관계자에게 항의하고 있다.>
1995년 2월부터 1998년 4월까지 공관을 이끌었던 박태희 12대 총영사는 안타깝게도 뇌졸중으로 쓰러져 6개월간 치료를 받다 귀국한 비운의 총영사였다.
박 총영사는 명석한 두뇌와 논리적인 사고를 가진 외교관이었으며, 한인행사에 참석해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한인들과 대화를 나누는 소탈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또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행사장 한쪽 구석에 몸을 감추고 담배를 입에 물 정도로 겸손했다.
일각에서는 평통회장 선출과정에서 너무 심한 스트레스를 받은 것이 발병의 원인이 됐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민형기 13대 총영사(1998년 5월-1999년 8월)는 한인들과 비교적 소원한 관계를 유지하다 떠난 인물. 필리핀 대사와 외교통상부 기획관리실장을 거쳤던 그는 권위적인 자세 때문에 한인들의 비판이 적지 않았다. 또 그는 북한을 방문했거나, 관계가 가까웠던 인사들에 대해서는 상당한 거부반응을 나타냈다.
민 총영사 재임시 함께 일했던 김천웅 부총영사가 당시 LA를 방문했던 이석현씨의 명함파문으로 결국 귀국 후 옷을 벗게 됐다는 얘기가 한인사회에 나돌기도 했다.
이 사건은 이씨가 ‘남조선 민주주의…’라고 적힌 명함을 한인들에게 돌린 사실이 한국 정부에 알려진 것을 놓고 벌어진 것으로, 일각에서는 본연의 업무에 충실한 ‘미국통’을 정치권이 제 입맛에 맞춰 처리한 것이라는 비난이 적지 않았다. 민 총영사는 귀국 후 외통부 산하 국제협력단 총재로 활동했다.
새 천년을 3개월 앞둔 1999년 9월 부임한 김명배 총영사는 대통령 비서실 보좌관과 외통부 정보과장, 주미대사관 근무 등을 거쳐 LA에 부임했다.
적어도 그는 가장 부지런했던 총영사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도산동상 건립사업과 남가주 한국학원 재정난 타개를 위해 본인이 직접 전면에서 나서 한인 유지들을 일일이 만나 지원을 얻어냈다. 그는 또 강력사건으로 한인 피해자가 발생하면 꼭 한인회장 등과 함께 유가족을 방문, 위로하는 일에도 열심이었다. 이 때문에 나중에는 한인회장이 유사 상황이 발생하면 총영사가 자신을 찾기 전에 아예 먼저 유가족을 찾아가는 모습이 벌어지기도 했다.
김 총영사는 재임시절 당시 야당 총재였던 이회창씨가 LA를 방문하자 극진히 영접했던 일로 인해 정치적 반대파들에 의해 극심한 견제와 비난을 받아야 했다. 그가 이 총재의 부인과 인척이었던게 화근이었다. 김 총영사는 이후 브라질 대사로 활동하다 은퇴한 뒤 현재는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생활하고 있다.
그의 뒤를 이어 포병 학사장교 출신인 성정경 총영사가 2001년 2월부터 근무를 시작한다.
합리적이고 중도적인 성격으로 네팔대사를 역임했던 그는 무난히 공관장의 업무를 수행했다는 평을 얻고 있다. 하지만 자신이 한번 결정한 사안에 대해서는 물러서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한 예로 어느 때보다 치열했던 평통회장 임명을 놓고 그는 자신이 추천했던 홍명기씨를 끝까지 밀어 붙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강력한 경쟁자였던 서영석씨가 발표 하루를 앞두고 사실상 확정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홍씨 지지세력의 강력한 대응으로 다음날 결과는 홍씨의 승리로 결말이 났다. 이 때문에 LA평통에서는 ‘밤새 안녕’이란 우스갯 말이 나돌았다.
성 총영사는 은퇴 후 강원도에서 평소 꿈꾸던 농촌생활을 하며 새로운 삶을 즐기고 있다.
이윤복 16대 총영사(2003년 6월-2006년 3월)는 온화한 성격으로 별다른 문제없이 업무를 수행했다. 그는 또 부담없는 술자리가 마련되면 격의없는 소탈한 모습으로 함께 어울리는 평범하고 순수한 외교관이었다. 때문에 일부에서는 적극성이 부족했다는 비평도 들었다.
쿠웨이트 대사와 외교안보연구원 교수부장을 거쳐 LA 총영사로 근무했던 그는 현재 여수 세계 엑스포 유치위원회 사무총장으로 활약중이다.
2006년 4월부터 공관을 이끌고 있는 최병효 17대 총영사는 이전 근무지가 포루투갈, 영국, 헝가리, 폴란드, 뉴질랜드, 태국, 노르웨이였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전문 외교관으로 외통부에서도 실력파로 인정받고 있는 인물. 그는 특히 다방면에 박식해 주변사람들을 놀라게 만들곤 한다.
최 총영사는 현재 LA 카운티 식물원에 한국정원을 건립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막대한 경비(1,700만달러)가 들어가는 만큼 이에 비판적인 여론도 적지 않은 이 사업을 어떻게 진행시킬지 한인사회가 주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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