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빠르다 해도 꽃 한 송이 피우기엔 넉넉하고, 인생이 짧다 해도 대들보 하나 얹기엔 충분한데 우리는 왜 이렇게 저 마다 조급한가.」 조운파의 시집 ‘무제’에 실린 한 구절이다.
지금의 60, 70대가 10, 20대였을 때만해도 세상이 시끄럽기는 했지만 세상 돌아가는 속도가 느린 탓으로 매사를 차분하게 대처하는 습성이 있었다. ‘빨리 빨리’는 불이 났을 때나 쓰는 말이고, ‘스트레스’란 말은 들어보지도 못한 말이었다. 오죽하면 ‘굼벵이 타령’이 있었을까.
땅이 넓고 주위의 환경 박자가 느긋한 탓이겠지만 목화와 콩의 산지라고는 하지만 이곳은 어디에 가나 유유자적(悠悠自適)하다. 거리에서 자동차 경적음을 들을 수 없는 것을 비롯하여 보는 것, 듣는 것 모두가 차분하다.
이렇게 조용하게 살다가 본국행 비행기를 타보면 사정은 다르다. 우선 공항에 내리기 전후부터 매사가 “빨리 빨리"에 밀려 어리둥절하게 된다. 그 빨리 빨리의 노출 장소는 광범위하다. 착륙전 기내의 얘기는 제쳐놓고, 우선 여기에서는 듣기 힘든 자동차 경적음 그리고 전철에서 버스에서 공중전화에서 엘리베이터에서 온통 빨리 빨리가 난무한다.
그런데 누군가는 「여기서도 안 그런 줄 아십니까. 골프장이나 한국식당에 가 보세요. ‘빨리 빨리’가 난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요, 한인업소에서 일하는 웬만한 외국 종업원들 ‘빨리 빨리’라는 말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어디서 이 습성이 왔을까. 우리 민족은 수많은 전란을 겪으면서도 차분했었다. 농경사회라고 하는 느긋한 특성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간장 된장 고추장 김치만 보아도 숙성(熟成)이라는 발효 기간을 거쳐 만들어지고, 음악 역시 서양의 음악보다 느리다. 우리의 전통 춤 또한 격렬하지 않고 ‘덩실덩실’이다.
돈이 등을 떠미는 바람에, 승용차 안에 속도 계기가 생기는 바람에, 오나가나 경쟁 때문에 이 같은 모든 것(돈·문화·경쟁)이 우리에게 “빨리 빨리"를 강요했음직하다.
실례 1 : 조선조 주기, 좌의정 약포 정탁(藥圃 鄭擢)이 남명 조식(南冥, 曺植)에게 사사를 마치고 벼슬길에 오를 때 「내 자네를 위해 소 한 필 뒤란에 메어 놓았으니 몰고가게나.」했다.
성미 급한 정탁이 뒤란에 가보니 매어 놓았다는 소가 없기에 두리번거리자「자네는 성미가 급해 기(氣)가 세어 매사를 그르치는 것이 흠일세. 여기 ‘쇠코뚜레’를 주는 것이니 평생 반려(伴侶) 하게나.」했다.
우보(牛步) 소걸음을 상징하는 이 ‘쇠코뚜레’가 아니었던들 나의 인생은 전혀 달라졌을 것이라는 것이 임진왜란 때 이순신(李舜臣)·곽재우(郭再祐)등 명장을 발탁한 정탁의 회고다. ‘쇠코뚜레’란 소의 코청을 꿰뚫어 끼는 나무 고리를 말한다.
실례2: 아프리카에서 영국의 측량사가 원주민들을 고용하여 험한 정글을 횡단하고 있었다.
얼마쯤 가다가 원주민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일제히 길에 주저앉았다. 측량사가 품삯이 적어 파업한 것으로 알고 넉넉하게 품삯을 주겠다고 하자 원주민 추장이 「그게 아니고 마음과 몸이 성급하여 영혼을 앞지르면 변고가 생기기에 이렇게 숨을 돌려 쉬었다 가자는 것이요.」라고 했다.
실례3: 끝으로 만성 TUI(조울증)에 해당하는 우화 하나가 있다. 동작이 빠른 사람이 출세가 빠르다고 생각한 한 영감이 사위를 찾고 있었는데 우연히 성급한 놈 하나를 발견했다. 측간에 들면서 허리끈이 잘 풀리지 않자 주머니칼을 꺼내어 자르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너 사위 삼겠으니 날을 잡자고 하니까 날 잡을 것 뭐 있습니까 오늘 밤 해 치웁시다 했다. 아따 그놈 되게 출세 빠르겠다 하고 신방을 차려 주었다.
이른 새벽에 신부 비명 소리가 들려 영감이 놀라 달려가 보았더니 신랑 놈 빗자루 거꾸로 들고 하룻밤 잤으면 애를 낳아야 할게 아니냐는 것이었다.
현대인은 동작이 민첩한 사람을 생동감이 있다하여 좋아한다. 그러나 기본과 원칙이 지켜지지 않으면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야 하는 번거러운 우(愚)를 겪게 된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수필가인 ‘피에르 쌍소’는 자신의 저서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진정한 느림이란 빠름에 적응할 수 있는 무능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급하게 다루지 않고, 시간에 떠밀리지 않으면서 나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고, 내 자유를 충족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자연은 봄을 조용하게 열고 있는데 사람들은 왠지 들뜨고 서두르고 있는 기색이다. 더욱이 젊은이는 봄과 충돌하기 쉬운 계절이다. 이럴 때일수록 각자가 무엇이 빠르고 무엇이 느린 것인지를 자세히 살펴, 기본과 원칙을 충실히 지키면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지혜를 갖았으면 한다.
앞서 예시 2에서「그게 아니고 마음과 몸이 성급하여 기(氣)를 앞지르면 변고(TUI)가 생기기에 이렇게 숨을 돌려 쉬었다 가자는 것이요.」이 말도 자신의 건강과 성취를 위해 명심했으면 한다. /ikhchang@aol.com
멤피스 한인사 편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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