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프가 식지 않을 거리」라는 말이 있다. 영국에서 거론됐다는 이 말은 자녀가 떨어져 사시는 부모에게 갓 만든 수프를 가져다 드릴 때 식지 않는 거리를 말한다.
부모와 적당히 떨어져 살면서 맛있는 별식을 만들면 공양도 하고, 급한 일이 있을 때 빨리 달려갈 수도 있는 거리다. 부모와 독립해 살면서도 알뜰하게 배려 하는 영국인다운 합리적 생각이다.
일본에서는 10여년전 「장국(미소시루)으로 식지 않을 거리를 측정한 결과 날씨가 영상 4-5도 정도일 경우 도보로 1.8Km(1.1마일)로 나타났다.
수프와 관련된 얘기로 더 심오한 것은 우리의 해장국이다. 해장국 하면 서울 청진동 해장국을 원조(元祖)로 치지만 이 원조의 원조는 경기 광주땅 남한산성의 효종국이다.
소문난 이 해장국은 토종 된장을 푼 쌀 뜨물에 배추속대와 콩나물, 표고버섯, 북어, 선지, 쇠 사골 등을 넣고 하루 종일 끓인 국이다.
남한산성은 한양에서 강을 건너고도 수십리 길이다. 하지만 효자는 이 해장국을 아버님께 드리고자 전야에 산성에 와 기다렸다가 효종국과 산성 막걸리를 사 들고 한양으로 향한다. 한양 성터 근처에 올 때 쯤이면 새벽 통금 해제를 알리는 파루(罷漏)의 종소리가 33번 울리게 된다.
그래서 새벽종 칠 때 성안에 도달한다 해서 효종국 또는 효종탕(孝鍾湯)이요, 아버지를 위해 효성을 다한다 하여 효종효자(孝鍾孝子)인 것이다.
서울 청진동 골목 좌우에는 「청진동 해장국 원조」라고 써 붙인 해장국 집이 좌우에 늘비하다. 들어가 보면 하나같이 유명 인사 또는 유명 탤런트가 다녀갔다는 기념사진이 벽에 걸려있다. 원조가 되는 할멈 집은 뻔히 알고 있는데 너도나도 「청진동 해장국의 원조」라니 그 옛날 “장돌뱅이"(행상·보부상) 조차 "몫 치기"라 하여 삼가했던 일이다.
「한국인에게 무엇이 있는가?」를 묻는 책에서 전 고려대 홍일식 총장은「한국인에게는 이런 저런 얘기도 있지만 조상 대대로 전래되어 온 부모공경사상 즉 ‘효’(孝)의 정신이 아직도 살아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 동안 「효」가 유교가 만들어 낸 전유물로 생각해 왔다. 효=유교의 등식이다. 그러나 유교는 불교의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이나 기독교의 십계명(十誡命) 중 제5계명과 같이 효에 대한 가치관과 실천방안만을 가르친 것이지 효를 유교가 전매특허로 삼은 것은 아니다.
우리가 보다 폭넓게 본다면 효는 인간사(人間史)와 같이 시작되고 인간사와 같이 존재할 윤리요, 도덕인 것이다.
’효’는 마음과 행동이 함께 작용해야 하지만 지금 시대에 행동까지 부모 마음에 쏙 들도록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또 지금의 부모들은 그걸 바라지도 않고 있는 실정이다.
다만 자식들의 ‘마음’만은 항상 포근한 솜방석 같이 부모 곁에 놔두는 최소한의 ‘효’는 반드시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할 것이다. ‘돈 벌기’가 새해 소원의 첫째, 그건 좋다. 그러나 비할 때 없는 또 다른 차원의 ‘기원’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미주의 한국노인들이 자식들과 같이 살고 싶은 비율은 60.5%인 반면, 자식들이 부모와 함께 살고 싶다는 비율은 29.6%에 불과하다는 통계가 나왔다. 평균적으로 10명 중 6명이 자식과 동거를 원하고 있지만 그 중 반에 해당하는 3명만이 동거가 이루어지고 나머지 3명은 별거하고 있는 실정이다.
미국에서의 부모 모시기가 이렇게 낮은 수치를 보인 것은 자식들과 손자 손녀와의 문화적인 차이가 주된 이유일 것이다.
노인들이 한국적인 것만 고집하는데 반해 2세들은 미국화가 되어 가고, 자식들은 일 때문에 바쁘기만 하다. 게다가 2세들은 ‘언어가 안 통한다’는 이유로 따돌림을 하게되니 노인들은 그저 서러운 생각만 하게되는 것이다.
이렇듯 전통적인 ‘따듯한 수프’을 기대할 수 없게 된 지금, 노인도 서둘러 변신해야 할 것이다. “아이도 한 그릇, 어른도 한 그릇"이란 속담과 같이 어른이 아이들과 같이 젊음의 대접을 받으려면 아이들 앞에 비틀거리지 말고 똑바로 설 수 있어야 한다. 세상사 돌아가는 일에 발도 맞추어야 하고, 말의 소재도 ‘왕년에는 내가 말이야…’를 뒤로 접어두고 미래적이여야 한다.
그리고 받지 못해 서글픈 ‘효’보다는 스스로 자신을 가다듬고, 당신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그 일에 푹 빠저볼 것이다.
ㄱ자로 굽은 허리로 가파른 언덕을 오르내리며 제 철 나물을 캐다 파는 할머니, 서울에서 나들이 온 꼬마 손자가 할머니에게 벙어리! 귀머거리! 심지어 바보라고 핀잔을 하지만 할머니는 인자하게 표정으로 듣고 표정으로 말을 한 우리 네 할머니였다.
도리어 벙어리, 귀머거리, 바보의 응보(應報)를 받아야 할 대상은 부모를 내 팽개친 불효자의 몫인지도 모른다. 영화 “집으로"를 통해 우리는 외롭지 않게 은세계를 펼치고 사는 두메 산골의 할머니를 본다.
/ikhchang@aol.com
멤피스 한인사 편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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