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독립전쟁은 13개 식민지가 연합해 일으켰지만 기여도는 달랐다. 이중 가장 중요한 주는 단연 버지니아였다. 미국의 ‘국부’로 불리는 조지 워싱턴이나 ‘독립 선언서’ 초안을 쓴 토머스 제퍼슨, 연방 헌법의 기초를 놓은 제임스 매디슨 등이 모두 버지니아인들이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당시 식민지 최대 지주였던 워싱턴을 비롯 대부분 ‘건국의 아버지’들은 대토지 소유주였거나 명문대를 나온 엘리트 출신이었다. 미 건국에 기여한 주요 인물 중 초대 재무장관을 지낸 알렉산더 해밀턴은 이들과 부류가 다른 드문 인물이었다.
그는 태생부터 미 본토가 아니라 카리브 해의 이름 없는 작은 섬 네비스에서 태어났다. 그것도 아버지는 스코틀랜드 출신 행상이었고 어머니는 남편과 자식을 버리고 집을 나온 기혼녀였다. 아버지는 해밀턴이 태어난 후 집을 나와 해밀턴은 어머니 손에 자랐는데 그나마 어머니가 12살 때 열병으로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사실상 고아가 됐다.
친척 집 상점에서 점원으로 일하며 근근히 살아가던 중 허리케인까지 덮쳐 가게마저 날아갔다. 극빈자로 인생을 마감해야 할 수도 있는 절망적 순간 뜻하지 않은 구원의 손길이 찾아온다. 그의 재능을 알아본 이웃들이 돈을 모아 지금 컬럼비아 대학의 전신인 뉴욕 킹스 칼리지로 유학 갈 수 있도록 장학금을 마련해 준 것이다.
대학에 다니는 동안 식민지 독립 필요성에 눈 뜬 그는 1775년 독립 전쟁이 발발하자 민병대에 지원하며 워싱턴의 눈에 들어 그의 부관이 된다. 1781년 독립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지은 요크타운 전투에서는 지휘관으로 참전해 혁혁한 공을 세운다.
독립은 얻었지만 당시 미국 정부는 13개 주들의 연합체로 조세권이 없어 주들의 자발적인 헌금에 의지해야 하는 형편으로 전쟁 부채를 해결할 능력이 없었다. 거기다 대니얼 셰이스 농민 반란 등이 일어나며 사회 불안은 심화됐다. 이대로 가다가는 제대로 된 나라를 운영해 보지도 못하고 미국 민주주의란 실험은 좌초될 것이란 위기감도 커졌다.
새 헌법의 필요성을 대중에 설득하기 위해 제임스 매디슨, 알렉산더 해밀턴과 훗날 연방 대법원장이 된 존 제이 등은 가명으로 신문에 에세이를 연달아 발표했는데 이는 훗날 ‘연방주의 논고’(Federalist Papers)란 이름으로 책으로 만들어진다. 총 85편으로 된 이 책자는 지금까지도 연방 헌법에 대한 최고의 해설서란 평을 받고 있는데 이중 52편이 해밀턴이 쓴 것이다.
해밀턴의 역할을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워싱턴에 의해 초대 재무장관으로 발탁된 그는 중앙 은행을 설립하고 전쟁 중 각 주정부가 발행한 채권을 연방 정부가 보증키로 함으로써 재정을 안정시키고 시장 경제를 토대를 다지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차기 대통령도 유력한 상황에서 그에게 대형 스캔들이 터진다. 남편에게 학대당하던 마리아 레이놀즈라는 여성이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과정에서 불륜에 빠진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별 얘기거리도 되지 않는 일이지만 당시로서는 충격이 컸다. 그는 스스로 ‘레니놀즈 팸플릿’이란 책자를 발간, 사건의 전모를 밝히고 공직에서 물러난다.
비극은 그 후에도 계속된다. 큰 아들이 필립이 아버지의 명예를 모욕한 자와 결투를 벌이다 사망하며 2년 뒤에는 해밀턴 자신이 자기를 모욕했다며 결투를 신청한 애런 버와 맞붙었다 총에 맞아 49세를 일기로 숨을 거둔다.
이처럼 극적인 삶을 살다 갔지만 해밀턴의 삶은 오랫 동안 세간의 뇌리에서 사라져 있었다. 그가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2015년 뮤지컬 ‘해밀턴’ 등장하면서부터다. 푸에르토 리코 이민자 가정 출신이 린-마누엘 미란다가 만든 이 뮤지컬은 랩과 힙합 등 비주류 음악을 기반으로 백인 일색인 ‘건국의 아버지’ 이야기에 흑인 등 유색 인종을 배우로 대거 발탁하면서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이 뮤지컬은 지금까지 티켓 판매 400만장, 미국내 매출만 10억 달러라는 경이적 기록을 세웠으며 퓰리처상과 11개 부문에서 토니상을 받았다. 이 작품 열기가 한창 뜨거웠을 때는 티켓 한장이 암표 시장에서 1만900달러에 팔리기도 했다.
이 작품이 이처럼 평론가와 대중들의 사람을 동시에 받은 것은 음악성도 뛰어나지만 스토리 자체가 탄탄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린-마누엘 미란다가 이 작품을 쓰게 된 것도 해밀턴에 관한 가장 뛰어난 전기로 꼽히는 론 처노우가 쓴 ‘알렉산더 해밀턴’을 읽고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주제는 미국을 위대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해밀턴 같은 이민자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각별하다. 지난 8일은 ‘해밀턴’이 세상에 나온지 1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일시적인 소동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뿌리는 이민이며 그 힘도 거기서 나온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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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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