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척에 방치된채 잠들어있던 독립운동가의 넋...
마운트 올리벳 묘지에서 황기환 묘비를 찾은 장철우 목사(왼쪽), 이정화 한미헤리티지재단 부회장, 그리고 필자.
장철우 목사 퀸즈매스패스 마운트올리벳 공동묘지서 황기환.염세우 묘비 찾아
국사편찬위 확인결과 1919~1923년 유럽.워싱턴서 활동 독립운동가란 사실 밝혀져
임시정부 주파리위원겸 런던주차위원,워싱턴선 이승만 도와...1923년 뉴욕서 타계
파리에서, 런던에서, 워싱턴에서 세계를 향해 조국 독립을 부르짖던 한 독립운동가의 넋이 낯선 미국땅 퀸즈의 공동묘지에 90년째 무연고로 방치돼 왔다. 영원히 독립될 것 같지 않던 조국은 그동안 해방됐고, 그로부터 기나긴 세월이 흘렀지만 어느 누구 그를 찾아 나선 후예들은 이제껏 없었다. 다만 남겨진 기록에 따라 조국은 뒤늦게 그의 공적을 기렸다. 지난 1995년 한국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지만 그의 최후 뉴욕 행적에 대해서는 지금껏 알려진 것이 없었다. 묘지의 주인공 황기환이 독립운동가라는 사실은 한국 국사편찬위원회(이하 국편) 해외사료조사위원을 겸임하고 있는 필자가 4일 국편에 확인한 결과 밝혀졌다.
그의 묘비는 퀸즈 매스패스 소재 마운트 올리벳 공동묘지 남쪽 묘역에 세워졌으나 당시 뉴욕에선 아무도 그가 독립운동가였음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 말년에 그가 다니던 뉴욕한인교회 명부에 딱 두줄로 남겨진 기록은 ‘황기환 : 서울에서 출생, 1923년 4월18일 사망, 장지 Grave No. 2484 in Plot Westlawn, Mount Olivet Cemetery’로 되어있었다. 이 기록을 갖고 2년전 뉴욕한인교회 장철우 담임목사가 현장을 답사한 결과 황기환과 염(렴)세우 두 교인의 초라한 묘비를 찾아냈다. 묘비는 아무도 관리하지 않은 듯 이리저리 뒹굴고 있었다.
이 사실에 접한 한미헤리티지재단(회장 유재두)이 이국땅에서 연고자도 없이 쓸쓸히 생을 마감한 이민 선배들의 넋을 기리자는 취지로 더 많은 한인들의 묘비를 찾아내어 한인묘역을 건립할 것을 약속했다. 2피트 높이의 묘비에는 한글로 ‘대한인 황긔환 지묘’ 라고 쓰고 가운데에 영문 이름 ‘Earl K. Whang, Born in Korea, Died April 19, 1923’이라고 쓰여있다. 이때까지만 해도 관련자들은 황기환이란 인물이 누구인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장목사의 추측으로는 1900년대초 하와이 이민 가운데 본토로 이주한 청년들이 미국 동서를 잇는 철도공사에 투입됐다가 또다른 일자리를 찾아 뉴욕으로 흘러들어온 막노동꾼들 중의 한사람 정도로 알고 있었다.
국편 자료에 기록된 독립운동가 황기환은 평안남도 순천 출신으로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유럽외교 및 파리강화회의의 외교활동을 전개할 목적으로 파리에 김규식을 파견, 설치한 주파리위원부에서 서기장, 부위원장으로 외교활동을 전개한 것으로 되어있다. 김규식을 도와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는 한편, 각종 강연회, 토론회를 개최, 한국독립의 정당성과 야만적인 일제의 침략사실을 폭로 규탄함으로써 한국문제를 세계여론화 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또한 1920년에는 영국으로 건너가 영국 국회의원 17명 등 저명인사 62명을 규합하여 한국독립 후원단체인 대영제국 한국친우회를 결성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파리위원 겸 런던주차위원으로 활동하던 그는 이듬해 워싱턴에서 태평양회의가 개최되자 미국으로 건너와 이승만, 서재필 등을 보좌하며 한때 워싱턴 구미위원부에서 외교활동을 벌이다가 22년쯤 뉴욕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뉴욕에서의 그의 행적은 비밀에 붙여진 듯 그가 출석하던 뉴욕한인교회에서도 그의 신분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그의 독립운동 기간은 1919년부터 23년까지 5년간 유럽과 미국을 무대로 펼쳐지다가 1923년 4월18일 지병인 심장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국가보훈처 홈페이지에 실린 그의 건국훈장 공적사항은 보다 구체적이다. 평남 순천사람인 그는 미국에 유학 가서 공부하던 중 미국이 세계 제1차 대전에 참전함에 따라 자원입대하여 출전한 것으로 되어있다. 1919년 6월 프랑스로 귀환한 그는 이승만이 워싱턴에 설립한 구미주차한국위원회의 원동지역 대표 김규식이 프랑스 베르사이유에서 개최되는 평화회의에 참석하고자 파리로 오자, 김복 등과 함께 대표단의 사무를 협조하는 동시에 김규식의 서기장으로 활약하면서 한국의 독립 선전활동에 종사했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프랑스 파리에 주재하는 한국선전단 선전국장으로 불어 잡지를 창간하여 한국의 독립을 세계 여러나라에 호소하는 한편 파리대학 교수인 우락을 초청하여 인권옹호회를 조직하고 지리학회장에서 ‘원동 한중 화평이 받는 압박’이란 주제로 강연회를 개최하는 등 언론을 통해 한국의 독립을 호소했다고 한다.
그해 10월 런던에서 매켄지와 윌리엄즈가 발기한 한국친우회에 참여, 활동했으며 임시정부 외무부 주차영국런던위원으로 임명된 그는 ‘영일동맹과 한국’이란 서적을 편집하여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것이 제국주의 열강들의 식민지 분할정책에서 비롯된 것임을 비판했다는 것이다. 공적사항은 또한 그가 워싱턴 구미위원부 본부에 와서도 이승만과 서재필을 도와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23년 뉴욕에서 타계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한편 황기환의 비석과 함께 발견된 염세우란 인물 역시 1920년대초 이승만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독립운동에 관한 의견을 나눈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유영익, 송병기, 이명래, 오영섭 등이 공저한 ‘이승만 동문 서한집’ 323페이지 ‘우남 간찰’이라는 항목에는 염세우가 이승만으로 부터 친서를 받은 적이 있는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그보다 앞서 염세우가 로스앤젤레스에서 신병치료를 받은 사실이 신한민보 1916년 5월25일자 인사동정 난에 실려있다.
또한 그가 사망하기 6개월 전인 1923년 3월22일자 신한민보에는 ‘뉴욕 동포들의 삼일경축’이라는 제하의 기사에 염세우가 천세헌, 곽림대, 천헌아, 이재희, 조병옥, 정원도, 임초, 서재필, 신마실나 등과 함께 기념식에 참석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황기환, 염세우 외에도 뉴욕한인교회 명부에는 강진주라는 평양부 출신의 교인이 1928년 11월2일 뉴욕시립병원에서 사망해 장석영 목사의 집례로 마운트 올리벳 묘지에 묻힌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외에도 얼마나 많은 수의 교인들이 이 묘지에 안장돼 있을지 모르지만 한미헤리티지재단 유재두 회장은 또다른 한인들의 무덤이 있는지를 확인한 후에 자비를 들여서라도 한인묘역을 단장할 것을 약속했다.
<조종무, 뉴저지 고문/한국 국사편찬위원회 해외사료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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