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3년 도미 후 유학생활 미국서 세상과의 소통창구
▶ 모친 소니아 석 여사 별세 1면 탑 보도한 지면은 ‘가보’
2017년 은퇴후 더 가까운 친구 젊은세대 신문 외면 안타까워
창간독자 장기열씨가 한국일보의 주요 기사를 모아 놓은 스크랩북을 펼쳐 보이는 모습에서 장씨의 ‘50년 한국일보 사랑’이 엿보인다. <박상혁 기자>
한인타운에서 ‘박사’라고 불리는 장기열(82)씨는 한국일보 창간독자다. 10년에 1번 강산이 변한다고 하는 말이 사실이라면 강산이 5번 바뀌는 동안 줄곧 같은 신문을 구독해 온 이유는 뭘까. 의외로 장씨의 대답은 단순했다. 떠나온 조국에 대한 소식과 이민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는 어찌 보면 지극히 평범함 그의 대답은 뭔가 특별함을 기대했던 예상을 여지없이 깨버렸다.
한국일보를 보게 된 이유를 묻는 질문에 장씨는 “떠나온 고국에 대한 소식이 궁금했고 한인타운의 정보도 궁금해서 한국일보를 보게 됐다”며 “당시 한국일보가 유일한 소통 수단이어서 한국일보의 덕을 보지 않은 한인들은 별로 없었다”고 말했다.
한국일보의 50년 역사가 한인 이민 사회의 역사인 것처럼 장씨의 삶 역시 한인 이민사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그는 1936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만석꾼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모친은 1996년 작고한 소니아 석 여사다. 석 여사는 LA한인회의 전신인 한인거류민회 회장 등 타운 60여개 단체장을 역임하며 LA한인사회 형성 초기 대표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어머니인 석 여사가 1948년 미국 유학길에 오르게 되면서 장씨는 학창시절을 이모 집에서 보내야 했다. 그는 서울사대부고를 거쳐 1955년 서울 치대에 입학했다. 군의관 복무를 마치고 1963년 모친이 있는 LA로 온 그는 도미 첫해 뉴욕에 갔다 유학생이었던 아내를 만나 1년 뒤 결혼해 가정을 꾸렸다.
장씨는 1963년 미국으로 건너와 고달픈 유학생활 끝에 1971년 1월 로마린다 대학 치대를 졸업했다.
그리고 장씨는 같은 해 LA에서 치과를 개업한 첫 번째 1세 한인 치과의사가 됐다.
당시 그는 한국일보의 덕을 톡톡히 봤다고 했다. 한국일보에서 장씨에 관한 기사를 다뤘기 때문이다. 당시엔 가주치과협회가 치과병원의 광고를 엄격히 금하고 있던 시절이라 개업을 알릴 수 있는 방법이 딱히 없다 보니 기사 한 줄이 곧 광고가 된 셈이다.
장씨는 “그 당시 한국일보에서 나와 병원에 대해서 기사를 통해 많이 알려 주었다”며 “한국일보 기사를 보고 병원에 찾아 오는 환자들이 많았다”고 술회했다.
환자가 많은 날엔 하루에 50~60명이 몰려들었을 정도로 장씨의 치과는 문전성시를 이뤘다.
장씨는 어머니 석 여사를 언급하면서 낡은 신문 하나를 조심스레 내어 보였다. 석 여사가 타계한 소식이 1면 탑 기사로 실린 1996년 7월15일자 한국일보였다. 가보처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장씨는 “어머니 소니아 석 여사의 장례식 기사가 한국일보 1면에 실릴 정도로 어머니의 활동상이 대단했다”고 회고하고 “한국일보는 한인 커뮤니티와 애환을 함께 하면서 한인들이 필요로 하는 미국 생활 정보를 신속 정확하게 다뤄주었다”고 말했다.
장박사는 1972년 한인회 이사 활동을 시작으로 1974년 현 LA한인상공회의소의 전신인 남가주 한인상공회의소에 이사로 들어가 한인 경제 발전을 위해 뛰었다. 1974~1975년 미국한인치과의사협회장, 1979~1981년까지 상공회의소 회장 등을 역임하며 한인사회를 다지는 데 기여했다.
상의 회장으로 활동하던 시절엔 ‘단체장을 하면서 단체 발전을 위해 자신의 주머니를 많이 털어낸 리더’로 상의 이사들에게 회자되기도 한다.
장씨의 이 같은 삶에는 어머니 석 여사의 영향이 컸다. 석 여사가 산 밥을 먹지 않은 한인회 직원이 없을 정도로 밥 사는 일에 인색하지 않았다.
그런 어머니를 닮아서일까. 장씨 역시 어머니와 같았다. 장씨의 좌우명이 ‘배고픈 사람 내가 돕는다’이니 말이다. 석 여사의 가르침이 장씨 삶의 토대가 된 셈이다.
그런 그도 은퇴는 피할 수 없었다. 지난 2017년 3월 반세기 가까운 시간 동안 일터였던 병원 문을 닫았다. 치과 간판을 뗄 때에는 눈물이 났다고 했다. 만감이 교차했던 것이다.
현역에서 은퇴한 장씨지만 신문 보는 일은 아직도 그의 일상의 삶으로 남아 있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예전과는 달리 로컬 기사를 먼저 보게 되었다는 것 빼고는 말이다. 장씨는 “젊은 시절에는 한국 정치 기사에 관심을 많이 가졌지만 지금은 로컬 기사에 더 큰 관심이 있다”고 말했다. 그만큼 미국에서 보내 시간이 더 많았던 탓일 것이다.
그렇다고 한국일보가 다 좋은 것만은 아닌 듯 싶다. 면 곳곳에 각종 광고들이 많이 있는 것이 눈에 거슬린다고 장씨는 지적했다. “과거에는 광고를 모은 면이 따로 있었는데 지금은 면마다 광고가 많아 좀 아쉽다”고 그는 말했다.
광고 수입으로 살아가는 신문사 생존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좀 더 많은 정보를 얻고 싶은 장씨의 바람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는 셈이다.
하지만 장씨에게 광고가 늘어난 현실보다 더 가슴 아픈 현실이 하나 있다. 바로 젊은 세대들이 신문을 외면하는 현실이 그것이다.
장씨에게도 두 아들과 딸 하나가 있다. 미국에서 나고 자란 세대이다 보니 한국말보다는 영어가 더 편한 세대다. 당연히 한국 신문을 보는 일도 거의 없다.
장씨는 “아이들이 어렸을 때 한국어를 가르치는 곳이 별로 없어 제대로 된 한국어 교육을 받지 못하다 보니 한국어와 멀어지게 됐다”고 안타까워했다.
은퇴하고 난 장씨의 삶은 어떨까. 장씨는 특별히 하는 일이 없는데 바쁘다고 했다. 남은 여생 다른 사람들에게 욕 안듣고 사는 게 목표라는 그에게선 어떤 욕심도 엿볼 수 없었다.
“남은 여생 계획? 그저 남에게 폐 끼치지 않고 나쁜 소리 안 들으면서 평범하게 사는 게 나의 바람”이라고 장씨는 담담히 말했다.
이런 장씨에게도 하나의 욕심이 있는 게 감지됐다. 50년 창간독자인 그는 가능하면 오래 동안 한국일보 독자로 남고 싶다는 말을 했기 때문이다.
장씨는 “미국생활에 정착하는 데 큰 도움이 된 한국일보를 읽으면서 삶이 허락하는 한 한국일보를 읽으면서 최장수 독자로 남고 싶다”고 말했다.
창간독자인 장씨는 한국일보 역시 지나 온 50년 만큼 앞으로 50년도 미주 한인 언론사로서 제몫을 다하기를 기원했다.
아마도 한국일보에 대한 장씨의 생각은 남다른 무엇이 있기 때문인 듯 하다.
“나에게 첫 신문이 한국일보여서 마치 첫 사랑과 같은 소중함이 있다”며 “다른 한인들에게 첫 사랑이 계속되는 한국일보가 되기를 바란다”는 장씨의 말에서 50년 한국일보에 쏟은 장씨의 애정이 물씬 묻어 난다.
장씨는 지금도 아침마다 한국일보를 기다린다고 했다. 매일 아침 펼쳐보는 한국일보에서 로컬 뉴스, 한국 뉴스와 함께 그는 세상을 읽는다. 한국일보를 보는 것이 장씨가 세상을 읽고 이해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래서 장씨는 아침마다 한국일보를 기다린다. 마치 첫 사랑을 기다리는 것처럼 말이다.
<
남상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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