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님보다 직원 먼저 배려했더니… 줄 서서 먹는 ‘쉑쉑버거’ 탄생
▶ 식도락 여행 즐기던 부모 밑에서 어린시절부터 음식에 큰 관심
억대 연봉 직장 과감하게 사표 고급스러운 동네 식당 차려
대니 마이어 USHG 회장. [SPC그룹 제공]
어느 찌는 듯한 여름 날, 미국 외식 기업 ‘유니언스퀘어호스피탈리티그룹(USHG)’의 대니 마이어 회장이 운영하는 한 식당에서 갑자기 에어컨이 고장 났다. 하필이면 가장 손님이 몰리는 점심시간 직전이었다. 수리하기도 어려웠다. 점심 식사를 예약한 손님만 100여명. 실내온도는 30도에 달하고, 정오가 가까워지면서 찜통 더위는 기승을 부렸다.
사장이나 종업원 모두 마땅한 방법을 찾지 못해 망연자실 할 법도 한 그때 한 직원(매니저)이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다. 그는 우선 밖으로 나가 선풍기 2개를 샀다. 비좁은 사무실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전화 예약을 받는 직원 2명에게 이를 틀어줬다. 예약 담당 직원들이 친절하게 전화를 받을 수 있게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다음엔 근처 다른 가게에 가서 전지로 작동하는 미니 선풍기를 몽땅 사왔다. 그는 에어컨 고장으로 찜통이 된 식당에 있던 손님들에게 진심 어린 사과와 함께 미니 선풍기를 선물로 줬다. 손님들은 짜증을 내기 보단 오히려 선물을 받아 즐거워했다.
27세에 첫 식당 ‘유니온스퀘어카페’를 열어 현재는 10여개 외식업체 브랜드를 경영하는 뉴욕 외식업계의‘거물’ 대니 마이어 회장이 자신의 성공담을 담아 펴낸 책 ‘세팅 더 테이블’에 소개된 이 일화는 그의 경영철학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대개는 손님에게 먼저 선풍기를 제공할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직원은 다른 동료 직원을 우선적으로 배려했다.
마이어 회장이 평소 “손님 보다 직원을 먼저 배려하면, 직원들도 손님을 배려한다”고 누누이 강조한 것을 실천으로 옮긴 것이다. 최근 한국을 방문한 그는 미국식 햄버거와 핫도그를 판매하는 USHG의 대표 외식 브랜드 업체 ‘쉐이크쉑(Shakeshack)’의 한국 파트너사인 SPC그룹이 마련한 간담회에서도 성공의 비결을 묻는 질문에 “따뜻한 배려는 USHG와 쉐이크쉑의 핵심 철학”이라며 “직원에 대한 배려가 더 좋은 제품과 서비스를 만들고 손님에 대한 환대로 이어진다”고 강조했다.
■학창시절 식도락이 취미인 소년
대니 마이어 회장은 1958년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프린스턴대)와 외할아버지(예일대)가 모두 손꼽히는 명문대를 나온 유복한 엘리트 집안이었다. 프린스턴대를 나와 여행사와 호텔을 운영한 아버지는 여행을 자주 다녔다. 그의 아버지는 매년 적어도 두 차례 어머니와 단둘이 휴가를 즐겼고, 마이어 회장을 비롯한 세 자녀를 데리고도 매년 세 차례 가족 여행을 하며 지역의 맛집들을 섭렵했다.
식도락 여행을 즐기는 부모는 그에게 큰 영향을 줬다. 어머니는 여행 중에 억지로라도 그에게 일기를 쓰게 했는데, 일기에 쓴 내용은 유명한 박물관이나 유서 깊은 성당에 대한 이야기 보단 주로 음식 얘기가 대부분이었다.
그는 성장기 사교생활에서도 음식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고교 1학년 때 자신을 포함해 남학생이 2명뿐인 가정시간 요리실습에 참여하면서 요리에 재미를 붙여갔다. 친구들과 축구, 테니스, 하키를 즐기면서도, 연인과 데이트를 할 때도 맛있다고 소문난 음식점을 찾아 다녔다. 아버지 역시 그를 고급 음식점에 데려가 직접 포도주의 맛을 가르쳐줬고 그는 이를 홀짝홀짝 마시며 와인 애호가로 성장했다.
학창 시절을 신나게 보낸 대신 우수했던 학업 성적은 뚝뚝 떨어졌다. 대학 입시에서도 그가 지원했던 명문 프린스턴대와 브라운대에는 낙방했고, 대기자 명단에 올랐던 코네티컷주 트리니티 칼리지(정치학 전공)에 간신히 합격할 수 있었다.
하마터면 대학에 못 갈 뻔했던 그는 1976년 고교 졸업 후 집을 떠나 살게 되면서 정신을 차렸다. 첫 학기에 거의 전 과목에서 A학점을 받았을 정도였다. 훗날 그는 “대학 입시가 내 안에 잠들었던 경쟁심을 흔들어 깨웠다”고 회고했다.
■억대 연봉 내던지고 식당 창업
1980년 대학을 졸업한 그는 이듬해 1월 외할아버지가 투자자로 참여한 중소기업 ‘체크포인트’에 입사했다. 도둑 침입 방지를 위한 전자 태그와 압력 감지 라벨을 제조·판매하는 이 회사에서 그는 연봉 1만6,500달러를 받으며 판매팀을 보조하는 특별사업부장으로 일했다. 1년 만에 뉴욕 지구 전체를 담당하는 영업직을 맡은 그는 뉴욕의 약국, 식품점, 옷가게 사장과 그 일가 친척을 알게 될 정도로 구석구석 누비고 다니면서 체크포인트의 ‘최고 영업사원’이 됐다. 그는 시간표를 짜서 부지런히 뛰어다닌 덕분에 정해진 목표를 초과 달성, 3년 간 체크포인트의 최고 영업사원 자리를 수성했다. 연봉도 본봉과 성과급을 합쳐 최고 12만5,000달러를 받았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꿈꿀 억대 연봉의 신화를 20대 젊은 영업사원이 만든 것이다.
1983년 하반기 그는 영국 런던에 지점을 여는 새로운 임무를 맡았을 때 고민에 빠졌다. 해외 근무는 매력적이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그의 꿈은 도둑을 잡는 일이 아니었다.
체크포인트를 그만둔 그는 전공을 살려 로스쿨 지원을 준비하기 위해 사설학원인‘스탠리 카플란’에 등록했다. 하지만 그것도 그의 가슴을 뛰게 하지는 못했다. 로스쿨 입학시험(LSAT)을 치르기 전날 친척들과 식사를 하던 그는 “법률가가 될 마음도 없는 내가 왜 LSAT를 치르는 지 모르겠다”고 푸념하듯 혼잣말을 할 정도였다. 그 때 외삼촌의 조언이 그의 인생을 바꿔놨다.
■‘배려’ 전략으로 뉴욕 외식업계 황제 등극
마이어는 뉴욕의 한 식당에서 8개월간 부지배인 겸 주방 보조로 일하고, 100일간 이탈리아와 프랑스 등 유럽 맛집을 순례한 이후 1985년 첫 식당 ‘유니언 스퀘어 카페’를 차렸다. 소박하지만, 따뜻한 배려와 고급 음식을 앞세운 ‘고급스러운 동네 식당’을 표방했다.
마이어의 전략은 적중해 9년 뒤에는 고급스런 프랑스 음식점을 냈고, 이후 재즈바 레스토랑 ‘재즈 스탠다드’, 바비큐 음식점 ‘블루 스모크’ 등 새 음식점을 잇따라 선보였다. 특히 2001년 뉴욕 메디슨스퀘어 공원 앞에 문을 연 1960년대 미 중서부에서 유행했던 햄버거와 시카고식 핫도그 매점은 큰 인기를 끌었다.
매년 여름마다 한시적으로 열었던 이 매점이 성황을 이루자 그는 2004년 ‘쉐이크쉑’이라는 간판을 걸고 정식 매장을 세웠다. 쉐이크쉑은 우리나라를 비롯해 전 세계 13개국에 120여개 매장이 있을 정도로 크게 성공했다. 2015년엔 뉴욕 증시에도 상장돼 현재 시가총액이 약 13억달러에 이른다. 개점하는 음식점 마다 대 히트를 치면서‘뉴욕 외식업계의 황제’로 불린 그는 2015년 미국 타임지가 발표한‘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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