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는 자는 말이 없다
승부의 세계에서는 이기는 자만이 말을 할 수 있다. 바둑으로 입신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9단이 이제 막 입단한 신예의 초단에게 패했다면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아무리 경력이 화려하고 실력이 출중하더라도 승부대국에서 진다면 어떠한 말도 변명처럼 들릴 것이다.
현대 바둑은 스피드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짧은 시간에 깊은 수읽기를 필요로 하고 번득이는 재치와 순발력으로 상대가 생각지도 못했던 수(手)를 찾아내 단숨에 승부를 결정짓는 방법이 각광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예전에 비해 대국시간이 짧다. 바둑은 생각을 많이 하는 경기인데 제한시간이 있기에 이제 장고(長考)도 할 수 없다. 장고하다가 시간패로 지게 되면 모든 것이 다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기에 바둑이 치열한 승부위주로 바뀐 것이다. 바둑돌의 모양과 형태 등 바둑의 미학을 중요시하며 품위를 지키던 전통바둑이 사라지고 오로지 이기기 위해서는 밑바닥을 기더라도 바둑을 둔다. 이제는 승리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 대세(大勢)가 된 것이다.
-400년 전통의 혼인보전
일본은 500년 전통으로 바둑 종주국임을 자랑한다. 그 오랜 전통만큼이나 바둑을 예도로 미학으로 떠받들고 살았다. 그리고 바둑의 명인들은 국가적인 명사로 예우를 받았다.
현재 일본에서는 400주년 기념대회인 67회 혼인보(本因防)전이 열리고 있다. 현 혼인보 명인인 야마시타 게이코(山下敬吾)와 도전자 이야마 유타(井山裕太)의 결승 7번기 중 최종국인 7국이 열리고 있다.
혼인보전은 초대 혼인보 산샤(算砂 1612-1623)를 시작으로 근대 21대 혼인보 슈사이(秀哉 1908-1940)에 이르기까지 바둑가문의 350년 전통을 생명처럼 존중하며 이어 내려왔다. 1936년 21대 혼인보를 마지막으로 일본의 마이니치 신문사에다 가문의 명예와 이름을 헌납하고 일본제일의 바둑 실력자가 혼인보 명인이 되어야 한다는 명분으로 일본 최초의 혼인보 바둑대회가 열리게 되었다.
진정한 일본 최고 바둑기사를 뽑는다는 이름하에 토너먼트와 전해의 시트를 통과한 기사들 8명을 선발하여 훌 리그를 치른다. 그야말로 일년 내내 바둑축제를 지내는 것이다.
그리고 혼인보 타이틀을 차지하기위해서는 도전자가 되어 7번의 결승대국을 치러야한다. 일본전국을 순회하며 결승 7번 기를 벌이는 것이다. 대국시간도 각자 8시간씩 휴식시간 포함하여 이틀걸이 바둑경기를 치른다. 부대행사와 오고가는 시간을 포함한다면 한번의 대국이 일주일이 넘는 대장정이다.
현재는 일본상금 서열 3위로 우승상금은 3200만엔(4억3천만원), 그 이외 대국료가 따로 지불된다. 웬만한 세계대회를 능가하는 규모로 치러진다. 그러기에 일본의 일류기사들은 규모가 작은 세계대회에는 출전하기를 꺼린다. 각종 일본의 대회 일정 참가에도 눈코 뜰새 없이 바쁜 것이다.
-변변한 세계대회 하나 열지 않는 일본
일본은 아직도 오랜 전통만큼이나 바둑의 천국이다. 각종 아마추어대회가 수백 개가 열리며 프로 공식기전도 일본기원, 관서기원이 주관하는 몫까지 합치면 수십 개가 넘는다. 프로 타이틀전 만해도 20개가 넘으며 많은 바둑애호가를 보유하고 있다. 바둑을 즐기는 사람은 물론이고 바둑을 모르는 일반인도 오랜 전통의 바둑을 예도로 인정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이 주최하는 세계대회라고 꼽을 수 있는 것은 얼마 안 된다. 동양 삼국의 바둑패권 경쟁에서 일본은 오래전부터 한국과 중국에 밀리고 있다. 자국 주최 세계대회에서 일본의 일류기사들이 패하고 타국의 선수에 타이틀을 빼앗기는 사태가 벌어지자 슬그머니 세계대회 후원을 중지한 것이다.
일본의 무수한 일류기사들이 세계바둑대회에서 무참하게 패하고 바둑종주국으로서의 일본인의 자존심을 추락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바둑을 사랑하는 그들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힌 것이다.
그렇지만 과연 누구를 위한 바둑문화며 기도인가. 동양 삼국 중에서 전통과 예도가 높다한들 세계대회에서 마냥 지기만 해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종주국이라고 아무리 떠들어봐야 귀담아 들어줄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들의 편협한 자부심과 자만심이 만들어놓은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이제라도 일본은 세계대회를 주최하고 자국의 많은 대회를 개방하여 선의 경쟁으로 동양 삼국의 세계화에 동참하여야 할 것 같다. 바둑을 통하여 동양 삼국의 우정도 다져가면서 말이다.choi1581@daum.net
풍운재 최환정(Charles Choi)
미국바둑협회(AGA) 공인 7단
워싱턴바둑동호인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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