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동안 노(老)배우의 얼굴은 상기돼 있었다. 그는 만면에 웃음을 띤 채 ‘연기 이야기’를 하고 또 했다. 최근에 다녀온 여행 이야기를 해도 이 ‘연기 백전노장’은 결국 연기 이야기를 했다. "그리스에 가서 제가 디오니소스 극장을 봤어요. 제가 배우잖아요. 그 감회라는 것이 이루 말할 수 없더라고요. 거기가 서양 연극의 발상지인데, 내가 거기 서서 연기를 하고 싶더라니까. 무대 중앙에는 못 들어가게 해놨어요. 그 옆에 서서라도…, 불같은 게 끓어 오르더라니까요."
1959년에 연극 무대에서 시작했으니 자그마치 56년 동안 연기를 했다. 반세기가 넘는 시간, 수많은 배우가 탄생하고 사라지는 동안에도 박근형(75)은 살아남았다. 박근형 또래 배우들은 이순재, 신구 정도다. 중요한 건 박근형이 살아남기만 한 건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연기를 생활인으로서 생계수단으로 남겨두지 않았다. 그에게 연기는 예술가로서의 창조 활동이다. ‘아우라’라는 말이 별다른 고민 없이 쓰이는 시기에 그는 자신만의 아우라를 발산하는 몇 안 되는 예술가다.
그 아우라가 박근형에게 강제규 감독의 신작 ‘장수상회’의 주인공 ‘김성칠’을 연기하게 했을 것이다. 70대 배우가 극영화에서 주연을 맡은 건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2010)의 이순재 외에는 없다. 조진웅을 비롯해 ‘장수상회’에 출연한 젊은 배우들은 “박근형 선생님의 연기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공부가 됐다"고 입을 모았다. 이는 과장이 아니다. ‘장수상회’의 박근형은 같은 무표정에도 다른 감정을 담는다.
“저는 역할에 대한 욕심이 강합니다. 백이면 백, 천이면 천, 제가 더 강해요. 현빈이가 드라마에서 다중인격 연기를 하더라고요. 그게 어려운 거거든요. 저도 도전해보고 싶더라니까요. 연극, TV, 영화를 오가면서 참 많은 역할을 했어요. 연극도 유럽연극, 러시아연극, 인도연극 안 해 본 게 없어요. 근데 새로운 게 또 나오니까, 계속 도전하고 싶어요. 지금 더 잘할 것 같아서요. 참 주책없지. 허허"
50대의 박근형은 젊지도 그렇다고 늙지도 않은 배우였다. 당시 자신을 박근형은 어디에도 발붙일 곳이 없는 시기였다고 표현했다. 연기에 관한 고민을 어느 때보다 많이 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고 있을 때, 박근형은 연기자협회가 내놓던 계간지를 들추다가 ‘역할 창조론’에 관한 글을 읽었다. 그는 조연을 맡더라도 자신이 연기하는 인물을 방관자나 보조로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작은 역할이라도 박근형이라는 배우의 내면에서 나오는 연기를 원했다.
“그때 마침 김종학 PD한테 연락이 왔어요. ‘여명의 눈동자’(1991~1992)라는 드라마를 하는데, 배역 하나 맡아달라고 하더라고요. 그 역할이 일본 앞잡이 조선인 역할이었어요. 일본 순사로 시작해서 일본경찰총국장까지 오르는 인물이었습니다. 손가락질받을 게 뻔한 역할이었죠. 그때 생각했어요. ‘이 인간의 내면을 보여주겠다. 그래서 손가락질받지 않게 하겠다.’ 그때의 그 연기가 ‘모래시계’로 이어졌고 ‘추적자’를 통해 ‘장수상회’에 도달하게 한 것 같아요."
‘장수상회’에는 매우 강력한 반전이 숨겨져 있다. 이 반전에 따라 김성칠이라는 인물이 규정된다. 김성칠은 한 명이지만, 박근형은 각기 다른 김성칠 세 명을 연기해야 한다. 대가의 연기법이 궁금해 김성칠을 어떻게 연기했는지 물었다. ‘대본을 읽다 보면 인물이 가슴 속에 들어온다’ 거나 ‘그냥 김성칠이 되면 된다’는 대답이 돌아올 줄 알았다. 하지만 박근형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연습을 해야죠. 연습을 많이 했어요."그는 “이론에 훈련이 더해져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짚었다. 그러면서 자신을 “그런 면에서 매우 고전적인 방식의 배우"라고 설명했다. 박근형은 ‘장수상회’ 촬영 6개월 전 시나리오를 받았다. 그 시간 동안 그는 김성칠이라는 인물을 파헤쳤다. “다른 일을 하더라도 머리 한구석으로는 항상 김성칠을 생각했다." 장면 하나를 연구하고 신(scene)과 신의 연결을 고민하고, 시퀀스를 들여다보고, 시퀀스와 시퀀스 간의 감정을 고려했다. 박근형은 그렇게 김성칠을 연습했다.
“조진웅과 몸싸움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여기서 감정을 좀 끌어 올리고 싶더라고요. 그다음 시퀀스가 극의 절정이니까 여기서 한 번 치고 나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야 감정이 폭발할 수 있으니까요. 그건 배우의 기술이죠. 아주 기술적인 그런 겁니다. 그래서 강 감독한테 제안했어요. 이렇게 하고 싶다고요. 감독님이 다행스럽게도 허락해줬어요."
‘그때의 연기는 철저히 계산된 것이었느냐’고 물었더니 박근형은 “완전히, 철저히 계산된 연기"라고 답했다. 대사별로 장별로 막별로 철저히 연구해서 계산된 연기를 하는 연극의 연기법을 그는 영화로 가져왔다. “모든 연기는 무대 연기가 기본"이라고 말했다.
박근형에게 가장 맘에 드는 장면을 하나 꼽아 달라고 했다. 정말 박근형다운 장면을 선택했다.
“조진웅과 같이 연기했던 장면인데요. 제가 꽃축제에 갔을 때 조진웅이 나를 탁 불러 세우는데 내가 그를 못 알아보는 장면이 있어요. 그때 그 표정, 정말 모르는 사람이 나를 불렀다는 듯한 그 표정이 기억나요. 아주 짧은 장면인데 한 네다섯 번 찍었어요. 영화로 보니까 정확하게 나온 것 같더라고요."
<손정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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