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규(53) 감독은 선구자 였다.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중반까지, 한국영화 최대 부흥기의 정점에 강제규가 있었다. 당시 ‘한국영화’와 강제규는 동의어였다. 과장이 아니다. 그의 데뷔작 ‘은행나무침대’(1996)는 한국 영화와 드라마를 통틀어 최초의 타임슬립 퓨전 판타지 사극이었다. 현재의 퓨전 사극 혹은 타임슬립 사극은 모두 강제규에게 빚이 있다. 두 번째 작품 ‘쉬리’(1999)는 어떤가. ‘쉬리’는 한국형 블록버스터 영화의 틀을 만든 작품이다. 강제규의 세 번째 연출작은 ‘태극기 휘날리며’(2004)다. ‘실미도’에 이은 두 번째 1,000만영화이고, 우리나라도 전쟁블록버스터가 가능하다는 걸 보여줬다. 이 영화는 한국 블록버스터 장르를 확장한 작품이다. 단 세 편의 영화만으로 강제규는 한국영화라는 기차를 추동하는 가장 성능 좋은 엔진이자 연료가 됐다. 게다가 그는 야심가였다. 동아시아 합작 전쟁블록버스터 ‘마이웨이’(2011)의 흥행 실패(제작비 280억원, 최종관객 214만명)를 딛고, 그가 4년 만에 내놓은 영화는 ‘장수상회’(4월9일 개봉)다. 만약 당신이 노년의 사랑을 다룬 이 작품을 아무런 외부 정보 없이 본다면, 연출자가 강제규 감독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소재의 문제도 아니고, 그 소재를 사용하는 화술의 문제도 아니다. 강제규의 영화에 야망이 보이지 않는다니. 그래서 강제규 감독을 꼭 만나야 했다. 만나서 어떻게 된 일인지 묻고 싶었다.
- 개봉이 얼마 남지 않았다. 기분이 어떤가.
“뭐랄까… 특별히 설렌다고 해야 하나. ‘은행나무침대’ 개봉할 때의 기분과 비슷하다. ‘은행나무침대’ 개봉날 퇴계로 쪽에 있는 한 극장에 갔다. 극장에 가까워질수록 떨리더라. 줄이 얼마나 서 있을까 하고. 지금이 딱 그런 기분이다."
- 그 전에는 영화가 개봉해도 무덤덤했다는 말로 들린다.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다. 대책 없는 자신감 아니었겠나."
- 이번에는 전작들을 내놨을 때보다 상대적으로 자신감이 떨어지나. 그렇다면 ‘장수상회’는 어떻게 탄생한 영화인가.
“음…이런 거다. 내가 연출 편수가 많지 않다. 그러다 보니 장르를 넘나든 적은 없었다. 내 영화는 한 편 한 편 긴 시간이 소요됐다. 내 영화와 내가 한국영화의 성장이라는 틀과 함께 갔기 때문이다. 그게 먼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뒤로 밀려있었던 측면이 있다. ‘장수상회’는 그렇게 우선순위에서 밀려있던 영화 중 하나가 아닐까."
- 하고 싶지 않은 영화를 의무감에 했는가.
“하기 싫었던 걸 했다는 말은 아니다. 전작들 또한 내게 큰 끌림을 줬기 때문에 했다. 당시는 한국영화가 가파른 성장을 하던 시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어떤 역할을 해내야 한다는 사명감이 분명히 있었다. 단순히 강제규 개인이 하고 싶은 영화에만 집중할 수 없는 시기였다."
- 그 시간을 후회하나.
“그렇지 않다. 난 소신 있게 내 길을 걸었다. 내가 하고 싶은 영화는 지금부터 만들면 된다. 그 시작이 ‘장수상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인터뷰가 초반부터 진지해졌다. 이왕 말이 나왔으니 나중에 하려던 질문을 당겨서 해야겠다. 전작인 ‘마이웨이’는 분명히 실패했다. 강제규가 한물갔다는 말도 많았다. 만약 내가 강제규라면 전작의 부진을 만회하기 위해 다시 한 번 블록버스터를 택했을 것 같다. 그런데 당신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묻고 싶다. ‘장수상회’는 어떻게 탄생했나.
“음….(웃음) 만약에 ‘마이웨이’가 내가 원한만큼 흥행했더라도 나는 쉼표를 찍고 갔을 것이다. ‘마이웨이’가 끝나고 나서 매우 큰 규모의 블록버스터영화 연출 제의를 받았다. 그런데 난 거절했다. 이미 ‘마이웨이’를 찍고 있을 때 쉬어가려고 했기 때문이다. 강제규 영화에 터닝포인트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던 시기였다. ‘장수상회’ 같은 영화를 만들겠다고 이미 생각하고 있었다."
- 그런 마음을 먹은 것치고는 작품이 늦게 나온 것 같다. 계산해보니 당신은 30대 때 2편, 40대 때 2편을 만들었더라. ‘장수상회’는 50대 첫 영화다.
“작품이 많이 적다. 개인적 성향인 것 같다. 결벽성 같은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나만이 걸어갔던 어떤 길이 준 특별한 훈장일 수도 있다. ‘은행나무침대’로 쏟아진 대중의 관심이 ‘쉬리’를 통해서 한국영화산업의 패러다임을 바꿔놨다. 다음 작품 ‘태극기 휘날리며’는 1,000만영화가 됐다. ‘태극기 휘날리며’ 끝나고 나니까 무언가가 나에게 ‘이제 너 어디로 갈래’라고 묻는 것 같더라. 그렇게 할리웃에서 영화 만들려고 미국에 갔고, 거기서 4년을 보내며 만든 ‘마이웨이’는 동아시아의 공통분모와 관심사를 갖고, 최소한 동아시아 내에서는 공감대를 확장하겠다는 의지로 내놓은 작품이었다. 그렇게 큰 행보를 하다 보니 시간이 좀 걸렸다. 나도 잔스텝으로 경쾌하게 움직이면 작품 더 할 수 있다.(웃음) ‘장수상회’ 시나리오 받고 영화 완성까지 1년1개월 걸렸다. 지금은 내가 굳이 무거운 몸짓을 할 이유가 없다. 마음이 많이 가벼워졌다. 이제는 관객하고 자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 이제 ‘장수상회’ 이야기를 해보자. 강제규가 새로운 장르에 도전했다는 말이 많지만, 당신의 화법은 변하지 않은 것 같더라. 초중반은 소소하게 흘러가지만 후반부에는 매우 강력한 반전을 숨기고 있고, 그 뒤에 신파가 이어진다. 이는 블록버스터영화 연출과 유사하다.
“음…지금 당신이 말한 것에 동의한다. ‘마이웨이’를 다시 보면서 영화 속 밀도가 너무 높다고 생각했다. 한 순간을 보면 좋은데, 전체를 보면 부담스럽달까. 다시 말해, 밸런스 조절을 못 했다. 그래서 영화의 밀도를 맞추려고 했다. 큰 것과 큰 것을 만나게 하는 게 아니라 작은 것을 모아 큰 감정을 만들려고 했다. 그게 ‘장수상회’를 통해 표현됐다."
- 굳이 장르로 ‘장수상회’를 구분하자면 ‘휴먼드라마’가 아닌가. 이런 장르는 말 그대로 드라마가 중요한 것이지, 반전이 중요한 건 아니지 않나. 영화가 반전에 집중된 것 같은 느낌도 있다. 꼭 반전이 필요했나.
“내가 수용할 수 있는 ‘톤 앤 매너’가 있고, 그럴 수 없는 게 있다. 이 영화를 만들면서 가장 고심했던 부분이 그것이다. ‘힘을 어디다 줄 것인가, 어디서 뺄 것인가’ 하는 거다. 최대한 작위적이고 의도적인 건 빼려고 했다. 하지만 내가 놓치기에는 힘든 지점들은 영화에 핵심적인 펀치가 없는 것이다. 노년의 로맨스를 그리는 영화를 시종일관 예쁘고 아름답게 그리기만 하는 영화를 만드는 데는 나는 아직 자신이 없다. 개인적인 취향이 그렇다."
- 한국영화의 질적 저하와 함께 당신이 우리 영화계에서 차지하는 위치도 변한 것 같다. 이제 강제규라는 이름보다 봉준호, 최동훈, 류승완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더 많다.
"그런 게 사는 거다. 누군가는 내가 영화를 만들지 않았던 시간을 보고 단순히 ‘공백’이라고 말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한 시간이었다. 그 속에서 내게 변화가 생겼다. 권력의 이동, 명예의 이동 이런 것들에 신경쓰지 않는다. 난 새롭게 시작하고 있다. 단편 ‘민우 씨 오는 날’이 그 시작이었다. 내가 한국영화를 위해 짊어졌던 것들, 사람들이 내게 붙여준 훈장, 닉네임, 명예 같은 것들로부터 이제는 편해졌다. 자유롭고, 경쾌하게 움직이고 싶다. 앞으로 한국영화계에서 내 위치가 어떻게 변할지는 모른다. 과거에 얽매이고 싶지 않다."
<손정빈 기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