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 드라마는요, (촬영) 시간이 없고 급하니까 제가 연기한 게 잘리지 않고 거의 다 나와요. 근데 영화는 편집이라는 게 있잖아요. 감독의 예술이라고 하는 게 그런 거잖아요. 편집하고 그러는 거. 제가 연기한 게 좀 잘렸더라고요. 반전의 강도를 세게 하기 위해서 그랬나 봐요. 제가 잘한 연기가 있는데, 뭔가 툭툭 끊겨. 내가 그래서 시사회 날 강제규 감독한테 따졌죠. 왜 그렇게 했느냐고. 멱살 잡으려고 했다니까.(웃음)"
배우 윤여정(68)은 영화를 어떻게 봤느냐는 말에 다짜고짜 이런 대답을 내놨다. 9일 개봉하는 영화 ‘장수상회’(감독 강제규)에서 그는 주인공 ‘금님’을 연기했다. 금님은 옆집에 사는 고집불통 노인 ‘성칠’(박근형)과 때늦은 연애를 하는 인물이다. 그런데 금님이 성격 괴팍한 성칠을 만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이는 관객을 놀라게 할 반전이다. 윤여정의 불만은 강제규 감독이 이 반전의 강도를 높이기 위해 자신이 연기한 분량을 잘라낸 점이다.
윤여정은 연기에 관한 질문을 할 때마다 농담과 진담을 섞어 편집에 대한 불만을 드러냈다. 시종일관 유쾌하고 유머러스했지만, 하고 싶은 말은 다 하고야 마는 특유의 성격은 감추지 않았다.
“성칠이 화장실에 있는 금님에게 노래 불러주는 장면 있잖아요. 제가 원래 거기서 연기를 더 했어요. 성칠이 노래 부르면 금님도 입을 뻥긋거리면서 노랫말을 말해요. 그러다가 감정이…, 이 장면도 그렇고 이것저것 빠지니까, 뭔가 아쉬워요. 연기를 하다 만 것 같아요."
배우들을 만나면 먼저 던지는 질문이 있다. ‘완성된 영화를 어떻게 보았는가’다. 대부분 배우는 “한 번 봐서는 모르겠더라고요"라고 답한다. 이어서 ‘본인의 연기는 어떻게 보았는가’라는 질문에는 대개 “많이 아쉽죠"라는 전형적인 답변을 한다. 윤여정은 달랐다. 그는 “내 연기만 봤다"고 말했다. “(영화를) 몇 번을 다시 봐도 (내 연기만 보는 건) 크게 다른 것 같지는 않다"고 했다. “배우는 이기적인 존재니까요."
윤여정은 한국 영화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여배우 가운데 한 명이다. 그는 그 나잇대 대부분 여배우처럼 ‘생활형 연기자’로 남지 않았다.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윤여정은 어떤 여배우보다 입체적이다. 그는 어디에나 있는 ‘엄마 연기’를 최고 수준으로 해냄과 동시에 어디에도 없는 특이한 ‘여자’를 연기한다. 젊은 배우들도 꺼리는 노출 연기도 마다치 않는다. 이런 점에서 윤여정은 한국 영화의 여성 캐릭터 확장에 혁혁한 공을 세우고 있는 배우이기도 하다.
“제가 환갑이 지나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이제는 좀 즐겨야겠다’라고요. 애들도 다 키웠고, 내가 해야 할 일, 의무는 다했잖아요. 육십 이후는 보너스라는 생각이 들면서 내가 하고 싶은 거 하고 싶더라고요. 특별한 계기라고 할 건 없고 육십 지나니까 그렇더라니까."
윤여정은 하고 싶은 연기를 한다. 연기를 즐긴다. 즐기는 인간의 삶은 생생하게 살아있을 확률이 높다. 살아있으니 욕심이 생긴다. 윤여정의 욕심은 그의 연기에 가 닿는다. 그는 여전히 더 연기를 잘하고 싶고, 더 좋은 연기를 보여주고 싶다. 연기로는 더는 이룰 게 없어 보이는 윤여정이 “배우고 싶었다"고 말하는 건 이 때문이다.
“조진웅 씨가 연기를 정말 잘하더라고요. 전 잘 몰랐어요. 많이 본 적이 없어서. 영화가 반전이 있잖아요. 조진웅 씨는 반전이 드러나기 전하고, 관객이 반전을 알고 나서 하는 연기가 정말 자연스럽게 이어지더라고요. 연기를 참 잘한다고 느꼈죠. 나는 좀…, 그래서 배우고 싶더라고요. 어떻게 한 건지.(웃음)"
윤여정은 불만을 드러냈지만, ‘장수상회’에서 그의 연기는 흠잡을 데 없다. 뒤늦은 연애에 설렘을 한가득 안은 여자의 얼굴이 그에게 있고, 걷잡을 수 없는 슬픔에 무너지고 마는 얼굴도 그에게 있다. 박근형과의 찰진 호흡은 그를 노인(극 중에서)이 아닌 여자로 보이게 한다. 이 영화에서 유독 윤여정이 예쁘게 나오는 건 이 때문일지도 모른다.
꼭 그 사람처럼 연기하는 윤여정이지만, ‘실제로 설레거나 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며 다시 매우 윤여정다운 대답을 내놨다.
“그건 내가 아니잖아요. 내가 ‘돈의 맛’에서 노출 연기를 했다고 하면 사람들이 내가 옷을 벗은 줄 알아. 그건 ‘그 여자’지. 내가 아니라고요. 내가 프로가 된 지 얼마나 오래됐는데…, 내가 왜 박근형 선생을 보고 설레.(웃음) 연기는 연기일 뿐이에요."
자신을 실용주의적인 사람이라고 설명한 그는(“돈이 궁하면 좋은 연기가 나와요.") “손해 보는 걸 싫어해요. 예술적이지가 못해서 미안해요"라며 웃었다.
<손정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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