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복 69돌 특별기획 시리즈-뉴욕일원 독립군 후손에 듣는다
▶ <2> 민영구 제독 아들 민중식 씨
민중식씨가 아버지 민영구 제독이 독립운동가로 활동할 당시의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광복군 창설시 주계관 임명
광복후엔 임시정부 주화대표단 총무처장 활동
“여기 조국 독립투사이며, 해군 창설 및 발전에 일생을 바친 민영구 제독이 영민하고 계시다”.
서울시 동작동 국립묘지 장군 묘역에 안장된 묘비 71호에 적힌 추모 글. 지난 2일 대뉴욕지구광복회 정기총회가 열린 퀸즈 플러싱 금강산식당에서 만난 민중식씨는 부친 민영구 제독의 추모 글을 회상하며 마음 속 깊이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날 민씨가 꺼낸 빛바랜 흑백 사진들 속에는 태극기 앞에서 권총과 수류탄을 손에 든 윤봉길 의사를 비롯 함께 일제에 항거한 투사들과 함께 찍은 모습들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다.
민영구 제독은 일본이 한국을 침략하자 9세의 나이에 3.1 독립운동에 앞장선 아버지 민제호 선생을 따라 중국 상하이로 넘어가 독립운동을 펼쳐온 인물. 중국으로 망명한 민 제독은 이후 독립투사들이 세운 상해 인성학교와 상해 운동중학교, 상해 만국상선학교 등을 졸업한 뒤 상해 화풍공사에 입사해 선장으로 근무했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부터는 한커우와 난징간 중국군대 및 군수품 수송임무를 담당했고, 1940년 광복군이 창설되자 주계장으로 임명돼 장사와 광주, 울산 등을 돌며 항일 선전 공작을 전개하는 등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펼쳤다.
이와 함께 간행지 ‘광복’을 발간해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취지와 활동, 광복군의 대일항전 등을 게재하여 항일독립 사상을 널리 전파했다. “당시 발행된 ‘광복’에 기재한 아버지의 글은 현재 영어로 번역돼 누구나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역사의 기록을 후세에 남기고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신 것 같아요“
민 제독은 이후 1945년까지 중경 임시정부 재무부장 이시영 선생 아래서 회계과장으로 일했고, 경리국장 및 광복군 총사령부 상교참모로 임명돼 활약했다. 광복 후에는 김구 선생의 명령으로 중국정부와 교섭하기 위한 임시정부의 주화대표단 총무처장으로 활동하다 1948년 6월 중국에 흩어져 있던 동포 1,000명을 인솔해 귀국했다. 민 제독은 귀국한 바로 그해 11월 한국정부의 해군에 입대해 해군본부 함정국장, 작전참모부장, 해군사관학교장 등을 두루 역임한 뒤 해군 소장으로 예편했다.
민 제독은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 받았다.
어머니 이국영 여사 역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의 여대원으로 활약하며 독립 운동에 앞장섰으며, 작은 할아버지 민필호 선생은 김구의 측근 중 한 사람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 주화대표단 부단장을 지내며 동포 교육과 보호에 힘썼다.
“워낙 어렸기 때문에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지만 책임감이 강하고 자기 소신이 평소 뚜렷하셨다고 합니다요. 조국을 위해 살아온 아버지의 길을 되돌아보면서 아버지께서 옳은 일을 했다는 사실이 너무도 자랑스럽습니다.”<조진우 기자> A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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