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수차 브라질행 왕년스타 이태호 감독
▶ 북가주 들러 한인 축구인들과 우정만남
1978년 아시아 청소년 축구대회 준결승전, 제2의 6.25라도 되는 듯 죽자사자 맞붙었던 남북대결이었다. 연장전 포함 120분 사투에도 결판은 나지 않았다. 승부차기마저 5대5. 이제는 한번만 삐끗하면 끝장인 서든데스 승부차기. 마침내 북의 오발탄, 또다시 남의 명중탄. 마지막 결정타의 주인공은 대전상고생 이태호, 2년 전 1학년 때 50일 간격으로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은 충격 속에서 축구로 부활한 고3 졸업반이었다.
그로부터 10년 이상, 청소년대표든 성인대표든 태극축구호엔 늘 이 사내가 있었다. 허리춤 경기조율사로, 최전방 골사냥꾼으로 그는 한국축구 도약기의 으뜸주역 중 한명이었다.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날리던 대선배 차범근은 고려대 및 대표팀 후배 이태호의 탁월한 득점감각에 놀라 ‘한국판 게르트 뮐러’(독일의 전설적 골게터)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1987년 가을부터 이 득점기계에 새 별명이 붙었다. ‘외눈 골잡이.’ 그해 4월 한국프로축구 전반기 개막전에서 부상으로 오른쪽 시력을 거의 잃었으나 후반기 개막전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거뜬히 부활, 1992년 은퇴할 때까지 두 눈 멀쩡할 때보다 더 가공할 골게터로 활약했기 때문이다.
은퇴후 학교팀과 프로팀을 오가며 지도자로 성공일기를 이어온 이태호 감독(50)이 14일 북가주에 왔다. 3월초 시작되는 브라질 축구연수를 앞두고 SF축구협회 핵심멤버인 30년 절친 강승혁씨를 만나기 위해서다. 이날 저녁 버클리에서의 만남에는 SF축구협회 이상호 회장, 조행훈 전 회장, 구세홍 전 사무총장 등이 함께했다.
“내가 키가 커, 덩치가 있어, 스피드가 좋아? 나중에는 눈까지 그래 돼버렸지? 버텨내려면 머리를 써야지, 머리로 해야지.”
그는 골게터 아니라 그냥 평범한 선수로도 모든 것이 녹록찮은 불리를 딛고 최순호와 함께 80년대 한국축구 최고골게터로 장수할 수 있었던 비결을 ‘머리’에 뒀다. 한국언론과의 숱한 인터뷰에서 “축구는 두뇌와 마음으로 하는 것”이라 설파했던 그다. 사실 그는 조광래 현 대표팀감독과 더불어 한국축구사 최고의 두뇌플레이어로 꼽힌다. 문전에서 수비수를 등졌다 순간적으로 따돌리는 플레이, 한템포 빠르게 혹은 느리게 좁은 틈새에서 나만의 공간을 창출하는 움직임, 그리고 미세한 발재간은 이태호의 전매특허였다.
“브라질? 전에 두번 연수를 했는데 그때 친하게 지낸 친구가 (브라질)프로팀을 맡게 돼 다시 한번 공부를 하려고. 나도 이제 (한국)프로팀에서 얘기가 있고 하니까 선진축구도 배울 겸 데려다쓸 선수도 살펴볼 겸.”
은퇴 뒤 약체 부산동의대(1995년)를 맡아 단기간에 강호로 올려놓으며 지도력을 인정받은 그는 대전시티즌(2000년), 신한고(2003년)에 이어 2007년부터 동의대팀을 다시 맡아 지난 연말까지 4년동안 지도했으며, 대전시티즌의 차기감독 물망에 올라 있다. 그는 이번(4일체류) 안되면 5월 귀국길에 다시 와 북가주 축구인들과 축구를 함께하며 이태호식 노하우를 나눌 생각이다. <정태수 기자>
사진/ 왼쪽부터 강승혁, 조행훈, 이태호, 구세홍, 이상호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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