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 열정 착취하는 이상한 구조"..구조개혁.지원방안 마련해야
"제가 올해 31살인데 29살에 영화 그만둘까 생각했어요. ‘반백수’라는 말이 딱 맞아요. 일은 있는데 수입은 없으니 백수인 거죠. 30살 되니까 사람들이 다 떨어져 나가더라고요. 영화계에는 재능도 재능이지만 ‘살아남는 자가 사는 거다’ 이런 얘기가 있어요."
생활고와 병마에 시달리다 최근 세상을 떠난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 씨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감독 지망생 A씨가 한 말이다.
최씨가 설 연휴를 앞두고 자신의 전셋집에서 홀로 쓸쓸히 숨진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영화계에 애도와 자성의 목소리가 높다.
영화산업 종사자들이 최소한의 생계도 보장받지 못하는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이들이 인간적인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산업 구조를 개혁하고 정책적인 지원 방안을 마련해야한다는 의견이 봇물터지듯 터져 나오고 있다.
◇"2천만원에 계약해 200만원만 받아" = 시나리오 고료는 작가의 지명도나 영화 예산에 따라 2천만~3천만원부터 6천만~7천만원까지 천차만별이다. A급 작가는 1억원까지도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제작사는 고료 일부를 선금으로 지급하지만 투자를 받지 못해 영화 제작에 들어가지 않으면 잔금을 안 주는 경우가 허다하다.
여러 편의 시나리오를 썼던 작가 출신 감독 B씨는 10일 "작가는 쓰는 것 자체가 좋으니 그냥 쓴다. 200만~300만원 받고도 그냥 시작한다"면서 "기성 작가는 시나리오를 완성하면서 잔금을 받지만 대부분 작가는 투자가 된 후에 받게된다. 그렇지만 투자가 안 되는 시나리오가 훨씬 많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심지어 1천만원의 싼값으로 계약하는 경우도 있다. 작가는 많고 제작사는 돈이 없고 하면 부르는 게 값"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도 각색 작업을 2천만원에 계약한 적이 있지만 정해진 기간을 훨씬 넘겨서 일했는데도 투자가 안 돼 200만원만 받고 나머지 1천800만원은 받지 못한 적도 있다고 했다.
시나리오를 완성하고 나서도 투자심의를 거치고 다시 수정하는 등의 과정을 여러 차례 반복하다 보면 1편에 1년 넘게 걸리기도 한다고 그는 설명했다.
감독이자 ‘조선명탐정-각시투구꽃의 비밀’ 등을 제작한 김조광수 청년필름 대표는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으면서 최고은 씨의 사례는 충분히 일어날 수 있을법한 일이라고 했다.
그는 "저도 17년 전에 영화한다면서 돈 몇백 원이 없어서 밖에도 못 나가고 굶은 적이 있었다. 지하 셋방에 살았는데 며칠 굶고 나니 너무 서러웠다"면서 "시나리오 써서 공모전에 냈는데 다 떨어지고 영화사에 보여줬는데, 돌아오는 답도 없어서 계속해야 되나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A씨는 "작가는 몇 년 동안 쓰는데 투자가 안 되면 (원고) A4 용지가 이면지가 되는 것"이라고 개탄했다.
◇뒤탈 두려워 돈 달란 요구 못해 = 시나리오 집필의 대가를 받지 못하더라도 정당한 문제제기를 하기는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김조광수 대표는 "신인은 돈을 안 준다고 소송을 걸기도 어렵다. 영화판이 좁으니 문제로 삼으면 다른 일을 못할까 걱정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 이대운 처우국장은 "시나리오 작가가 돈을 다 받지 못해 노조 신문고로 신고하는 사례는 매년 5건 정도"라면서 "신문고의 존재 자체도 모르는 작가들도 많고 신고를 꺼리는 분이 많아 실제로는 훨씬 많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스태프를 대상으로 임금체납에 어떻게 대처하느냐는 설문조사를 했을 때 80%는 ‘피해를 감수하고 기다린다’고 답했다"면서 "시나리오 작가는 스태프보다도 더 약자다. 스태프는 임금을 못 받으면 충분히 요구할 수 있지만, 작가는 투자되기 전에 노무를 제공하기 때문에 더 열악한 것"이라고 말했다.
A씨는 정당한 보수를 받지 못하는 현실이 어느새 당연시된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영화가 안 엎어지면 운이 좋은 거고 엎어지면 ‘좀 기다려 보자’ ‘언젠가 될 거야’라고 생각한다"면서 "현실에 체념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조광수 대표는 미국의 경우 방송ㆍ영화 작가조합이 방송사와 할리우드 제작사를 상대로 파업을 벌이는 등 작가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고 있지만 국내의 시나리오작가 협회나 조합은 친목단체 수준이라고 말했다.
◇"열정 착취하는 이상한 구조" = 작가를 포함한 영화인들의 처우가 열악한 것은 영화 산업 전반의 구조적 문제와 정책적인 미비가 문제라는 지적이 많다.
B감독은 "정말 힘들어서 월급을 못 주는 제작사도 있다. 그럼 투자사가 나쁘냐? 돈 벌려고 주판을 튕기는 걸 욕할 수는 없다"면서 "보호 장치가 없다는 것이 문제다. (영화에 대한) 열정을 착취하는 이상한 구조인데 너무 멀쩡하게 돌아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문제는 돈을 번 뒤에도 챙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제작사는 돈을 벌면 자기들이 번 줄 안다. 영화가 잘 돼도 고생한 스태프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다"고 아쉬워했다.
김조광수 대표는 "일부 회사는 계약금을 너무 조금 준다"면서도 "영화계가 착취 구조라고 무조건 얘기하기는 어렵다. 영화사와 작업을 하지 않고 혼자 작업하거나 하면 보호를 받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물론 정당한 임금 지급이 이뤄져야 하지만 제도적 뒷받침이 있어야한다"면서 "쉬는 기간이 길어지면 프랑스에서는 실업급여를 주는데 이런 사회적 안전망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울=연합뉴스) 김윤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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