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원한 금융인 정원훈 남기고 싶은 이야기 - <2> 만주중앙은행
2004년 서울에서 신의주 상업 동창생들과 자리를 함께 했다. 맨 왼쪽이 저자.
‘만일조몽로’ 오족협회 당시 시대상 반영
한중선수단 일 꺾고 마라톤 우승 추억도
동창·선배들과 영어독서 회합 고전 섭렵
▲신경
그토록 학업에는 충실치 않았는데도 성적은 그리 나쁘지 않았던 모양이다. 졸업을 하면서 만주국의 만주중앙은행에 지원을 했더니 쉬이 받아주었다. 만주는 내 고향에서 압록강만 건너면 된다. 서울보다 비교할 수 없이 가까웠다.
만주는 당시 일본이 세운 괴뢰국이며 식민지였다. 이 ‘제국’의 왕으로 청국의 마지막 황제 부의가 옹립해 있었다. 나는 일본국의 국민으로 태어났었는데 이제 부의 황제의 신하가 된 셈이다. 후에 대한민국 국민의 영예를 되찾았다. 충신은 2군을 섬기지 않는다 하는데 나는 미국 시민권을 받으면 4개 군주를 모시는 게 아닌가. 이런 지조로서 어찌 남이라 할 수 있겠는가.
1941년 봄은 세계 제2차 대전 개막 직전이어서 일본 군국주의가 제멋대로 판을 치고 있었다.
수도를 신경이라 했는데 오늘의 장춘으로 일본보다는 미국식에 가까운 신도시였다.
예를 들어 넓은 지하층을 포함한 중앙은행의 화폐취급 시설, 건물 내외의 통신장비들은 미국에서 수입한 특제품들이었다. 중앙은행이 위치한 대동대가 광장에는 양식의 중은 6층 빌딩 외에 동양사원식 지붕을 얹은 수층건물이 너덧 둘러싸고 있어 장관을 이루었다. 그곳으로부터 몇 마일 떨어진 곳에 중앙은행의 주택촌이 있었다. 그해 가을 집에 와서 장가를 들고 갔더니 집을 하나 할당해 주었다.
1941년에 중앙은행의 점포망은 만주국 전역에 걸쳐 수십 개가 펴져 있었고 직원 수도 5,000여명에 달했다. 그 중 일본인이 500여명이라 했다. 조선인은 30인 내외로 그중 17명이 신경에서 근무했다. 이 해 신입행원은 나를 포함 7명이었다. 이들 7명 시절이 중앙은행 설립 후 가장 조선인이 많이 근무하던 때였을 것이다.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지 30년이 되어 그들의 식민정책이 상당한 성과를 보여 부분적이나마 조선인 인재의 배출이 궤도에 올랐던 시기였던 것 같다. 그런 관점이었을까? 조선인 재직자들은 소위 5족 중 일본인과 같은 특혜를 받았다.
당시는 일본의 대동아 전쟁이 한창 상승세였던 때여서 그들은 만주에서 정신함양을 한다며 소위 ‘중은협화회’를 만들어 오족협화를 중심 원칙으로 삼았다. 오족이란 만일조몽로(滿日朝蒙露). 이렇게 민족을 구별해 놓고 협화한다고 혼자서 소리를 지르는 꼴이었다. 이런 민족파별은 생필품 배급에서 가장 두드러졌다.
예를 들어 쌀, 설탕, 담배 같은 것은 일본인에게는 먹고 남을 만큼 배급을 주었다. 만주인에게는 대목 때 돼지고기 같은 것은 선심을 쓰지만 쌀은 거의 나눠주지 않았다. 조선인들에게는 얼마간의 쌀은 주지만 다른 부분은 몹시 인색했다. 몽고인과 러시아인들은 가장 열등한 대우를 받는다고들 했다. 나는 몽고인을 만난 적이 없다. 그러나 러시아인들은 사택촌에서 경호를 담당하는 자들을 보곤 했다. 이들은 성실하고 용감해서 우리들의 칭송을 받았다.
어느 해 가을 중은협화회에서 팀 대항 마라톤대회를 개최한다고 했다. 10명이 한 팀이 되어 공주령 근처를 왕복하는 것이다. 다 뛰고 보니까 수시간여가 걸렸던 것으로 보아 아마도 완주 마라톤 코스 만한 거리였을 것이다.
대회 예정이 발표되자 일본인들 두 팀이 자원했다. 이어 중국인들이 한 팀 참가한다는 말이 들렸다. 김응진군이 우리도 참가하잔다. 좋지만 인원이 모자란다. 축구팀에 참가한 5명 외에 가까스로 두 사람-정구를 좋아하던 유군과 이군-의 동의를 얻었다. 나머지는 같은 축구팀의 중국인 친구 3명을 끌어들였다. 이들 남자팀 외에 일본 여자들이 한 팀 중국인 여직원들이 한 팀 참가했다.
먼저 이 마라톤 개최에 있어서는 협화회 주최측에서 어떤 내의가 있어 보인다고 했다. 게다가 주최측에서는 이번 대회에서 일본 청년팀 두 팀이 모두 선두를 차지할 것으로 내다본 것이다. 이렇게 되면 5족 중에 일본인의 우수성을 뽐낼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이 대회를 성립시키기 위해 우리들에게도 꼭 한 팀을 내려달라던 협회 사무장의 부탁을 받아들일 수 있어서 다행으로 여기고 있을 뿐이었다.
새벽 6시 북만주의 아침은 아직 어둠에 싸여 있었다. 쌀쌀한 아침 바람을 헤치며 우리들은 사뿐사뿐 달렸다. 광활한 북만주 대평야를 옆으로 햇살이 떠오를 때 우리 팀은 이미 선두를 달리고 있었고 뒤를 따르고 있는 팀도 보이지 않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결승 테입을 끊고 보니 우리 팀이 다음의 일본인 A팀보다 1시간이나 앞서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한번 이변이 생겼다. 중국인 여성 팀이 일본인 B팀과 앞을 다투며 몇 반 앞서서 결승선을 넘은 것이다. 지금도 그때 늘씬한 몸매의 중국 여인들이 가슴을 펴내면서 긴 머리카락을 바람에 휘날리던 광경이 떠오른다. 그것은 평소 뒷전에서 눈에 띄지 않던 발권부 여자직원들이 오래 동안 품고 있던 민족적 자긍심의 표출 외에 다른 것이 아니었다. 일본인 B팀이 라스트 스퍼트를 터트리지 못한 것은 아마도 우리 팀도 겪었던 한 두 사람의 사고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하간 우리 조선·중국 혼합팀의 우승은 누구도 생각지 못한 일이지만 주최자 측에도 당혹감을 감추지 못할 결과가 발생한 것이다.
결국 주최측은 수상식에서 우승팀에게만 주려던 상금 300원을 150원으로 깎고 나머지를 다른 팀에게 분배하였다. 우리는 우선 그 돈은 받기로 했다. 내가 선수들을 설득했다. 그리고 받은 돈을 그 자리에서 협화회에 기부했다. 협화회 사무장의 약간 당혹스럽던 표정이 지금도 선히 보이는 듯하다.
▲영어학습
신경에는 같은 고상동창인 정수창군(그 후 삼성사장, OB사장, 상공회의소회장 등 역임), 앞서 본 상업학교 동창인 김병겸군이 일본의 이다루고상을 졸업하고 이곳에 취직이 되어 와 있었다.
이런 이들과 모이고 보니 언젠가 영어공부를 해보면 어떨까 하는 이야기가 나왔다. 때마침 권중희 선생이 공업대학의 영어교수로 와 계셨다. 그는 정군의 대구고보 대선배로 서로 연락이 닿아서 권 선생에 집에서 Thomas Hardy를 읽기로 했다. Jude, The Obscure. 다음은 같은 저의 Pamela. 후자는 완독은 못한 채 조금 간격을 두고 Shakespear로 옮겼다. The Midnight Summer Dream, Hamlet 등이었다.
당시 영어는 거의 소용없는 언어였다. 나는 우리들이 하고 있는 영어독서회합이 더욱 더 귀중한 것이 아닐까 되새겨 보았다. 그러면서도 후에 영어가 밥줄이 될 날이 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