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추기경이 한국사회에 남긴 족적>
한국사회 나아갈 길 밝혀온 큰 횃불
한국시간 16일 선종한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은 단지 훌륭한 종교인을 넘어 한국 사회의 큰어른이자 정신적 지도자였다.
교회는 자기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고 세상을 위해서, 사회를 위해서, 남을 위해서있다고 말한 김 추기경은 교회 안에서만 머물러있지 않고, 사회로 나와 소신 있는 발언을 잇따라 쏟아내며 한국 사회가 나아갈 길을 밝혀온 큰 횃불이었다.
◇소신 있는 정치적 발언 = 1970년대 민주화 운동 현장에서 김 추기경은 소신 있는 정치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으며 민주화 운동의 한 가운데에 섰다.
김 추기경은 1971년 예수성탄대축일 때 장기 집권의 길로 들어선 박정희 정권을 처음으로 공개 비판했다. 전국에 생중계된 이 미사는 강론 말미에 정권의 지시로 중단되기도 했다.
이듬해 7ㆍ4 남북 공동 성명 발표와 8ㆍ3 긴급조치, 10월 유신으로 이어지는 정국의 혼란기에서 주교회의 의장이던 김 추기경은 시국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성명에는 7ㆍ4 남북 공동 성명을 평화 위장의 전쟁 준비 수단이나 권력 정치의 기만 전술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민족과 더불어 엄숙히 경고한다, 사회 안정과 질서를 흔드는 비상조치를 남발하는 권력의 폭주를 엄계한다는 등의 강도 높은 발언이 담겼다.
이후 1974년 지학순 주교의 구속을 시작으로 1976년 명동 3ㆍ1절 기도회, 1978년 전주교구 7ㆍ18 기도회 등에서 사제들이 잇따라 구속되면서 고인은 잇단 성명서와 강론을 통해 자유언론과 인권, 민주회복 등을 강조했다.
이러한 김 추기경의 정치적인 참여는 천주교와 정권과의 원치 않는 대립을 낳았으며 교회 내부에서도 교회의 정치 개입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1980년대 명동성당이 민주화 운동의 해방구 역할을 하면서 김 추기경의 소신 행보도 이어졌다.
고인은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모든 신자들에게 광주를 위한 특별기도를 요청했으며 6ㆍ10 국민운동 당시에는 명동성당에 진입한 시위대를 강제 연행하려던 정부에 단호하게 맞서기도 했다.
◇인권과 노동, 생명 사랑 = 김 추기경의 사회 참여는 비단 정치적인 것에만 그치지 않았다.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하는 공동선의 추구에 목표를 둔 그는 소외된 자들의 인권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경제 성장이 지상과제이던 1960-1970년대 추기경은 산업화 과정에서 희생된 노동자들에게 관심을 돌렸다.
1967년 5월 강화도 심도직물의 노조원 해고 사태 당시 김 추기경의 건의에 따라 주교회의는 ‘사회 정의와 노동자 권익 옹호를 위한 교단 공동 성명서’를 발표하며 처음으로 대사회 메시지를 던졌다.
이후에도 동일방직 사건 등 유사한 노동 탄압 사례가 있을 때마다 추기경은 노동자 인권을 지키는 데 앞장섰다.
김 추기경의 인권과 생명 사랑 정신은 사형제 폐지와 낙태 반대에 대한 천주교의 목소리도 키웠다.
1964년 가톨릭 시보사 사장 시절 한 사형수와 깊은 인연을 맺기도 했던 김수환 추기경은 사형이라는 보복성 형벌 대신 용서와 사랑을 강조했으며, 기회가 닿을 때마다 태아의 생명을 가벼이 여기는 풍조를 강도 높게 비판하기도 했다.
◇민족화해ㆍ통일을 향한 열정 = 김 추기경은 매일 미사를 집전할 때마다 항상 마지막 기도와 축복은 북한 신자를 위해 바칠 정도로 통일에 대한 깊은 열정을 나타냈다.
그는 우리 사회 ‘레드 콤플렉스’가 극심했던 시절에도 서슴 없이 북한 관련 발언을 해 소신을 밝혔다.
1989년 서경원 의원의 방북사건이 있을 무렵 그는 기자회견을 자청해 남북관계 호전을 바라는 교회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그해 북한은 바티칸을 방문했던 김 추기경을 평양에 초대하기도 했는데 그의 방북은 최종 조율단계에서 무산되고 말았다.
김 추기경의 지시로 서울대교구는 1991년부터 각 본당마다 예산의 3%를 통일기금으로 조성하기도 했다.
남북 관계가 경색될 때마다 남북한 정부를 향한 신중한 발언도 내놓았다.
1993년 북한이 핵무기비확산조약(NPT)을 탈퇴하고 노동1호 미사일을 쏘아올렸을 때 추기경은 북한에 핵문제 청산과 개방을 요구하는 동시에 북한이 미국, 일본과 국교 정상화를 이룰 수 있도록 우리가 도와야한다고 강조했으며 1996년 강릉 잠수함 침투사건 때는 북한에는 정중한 사죄를, 남한에는 유연한 자세를 촉구했다.
외환위기 때도 어려운 북한 이웃에 대한 관심을 호소했던 김 추기경은 끝내 고대하던 방북을 이루지 못한 채 세상을 뜨고 말았다.
(서울=연합뉴스) 고미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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